生活文化/그때그일그사람

과거시험 수석들이 말한다 “출제자 의도를 파악하시오”

바람아님 2015. 7. 17. 09:32


동아일보 2015-07-16 


과거 답안지 ‘시권’ 전시를 통해 본 ‘장원급제의 비결’

조선 현종 5년(1664년) 함경도 길주에서 시행된 과거 장면을 그린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위 사진). 중앙의 관아에서 시험을 주관하는 시관들과 아래쪽 시험장 안에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장원급제한 박세당의 시권(답안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흔히 말하는 장원급제는 어떤 시험에 합격한 것을 말하는 걸까.

고려,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고시였던 문과(대과)에서 ‘갑과(甲科) 제1인’(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장원급제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장원급제자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은 무엇이 특별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소장한 시권(試券·답안) 300여 점 중 대책문(對策文)을 중심으로 ‘시권, 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 전시를 11월 29일까지 열고 있다. 이 전시에 등장한 시권을 통해 장원급제의 비결을 살펴봤다.


○ 성역 없는 비판의식을 가져라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子)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습니다. 하찮은 토공(土貢·세금)이라 하더라도 전부 지관(地官·재정담당 부서)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소서.”

박세당(1629∼1703)이 1660년 현종 즉위 기념으로 시행된 대과에서 내놓은 답이다. 시제(試題)는 국가의 재정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박세당은 왕실의 재정 간섭을 차단할 것을 주장했다. 임금이 언짢아할 수 있는 답이었지만 장원급제했다. 눈치 보지 않는 ‘소신 답안’이 주효했던 것.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 김육 밑에서 배운 허적이 당시 시험관이었다”며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정파를 초월했고 서인인 박세당을 장원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

고려 공민왕은 즉위 9년(1360년) 문과시험을 연다. 문제는 “태공망(太公望) 사마양저(司馬穰(자,저,차)) 손빈(孫賓) 오기(吳起) 공명(孔明) 이정(李靖) 등의 병서 중 어떤 책이 핵심적이며, 치란(治亂)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쓰는 도리의 요점은 무엇인가?”였다.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공민왕의 고민이 배어 나온다.

열거된 병법가들의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정몽주(1337∼1392)는 특정 병서를 꼽는 대신 “문무 병용(竝用)은 모든 왕의 대법(大法)이고 만세의 떳떳한 원칙”이라는 답안을 작성해 장원급제했다. 김 연구실장은 “정몽주의 책문(답안)은 문무를 아우른 인재를 선발하려던 공민왕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며 “문무 병용의 실패 사례로 원나라를 거론한 것도 배원(排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주는 자신의 책문처럼 문신이 된 뒤에도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 현안에 민감하라

“신이 국도(國都·한양)에 들어오던 날에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오직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전하의 물음을 받드오니 또한 ‘도적을 다스림’이라는 물음이셨습니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문과 식년시에 응시한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 선비 조덕순(1652∼1693)의 답안 첫머리다. ‘도둑을 다스리는 방책’이 시제였는데 이는 조덕순이 한양에 시험 치러 올라온 뒤 주민들에게 이미 그 심각성을 들은 문제였다. 그는 교화와 어진 정치를 강조하는 답변으로 장원급제했다. 백성들의 여론에서 예상 문제를 찾으려 했던 작전이 성공했던 셈이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78)은 “과거에서는 1차에서 경전, 2차에서 그를 응용한 작문시험을 본 뒤 3차에서 정책 입안 능력이 있는지를 봤다”며 “지금으로 치면 ‘메르스 방지책을 논하라’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내 인재를 선발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