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2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6> JP와 ‘국제시장’ ① 광부·간호사 서독 파견
1차 외유 유럽서 빈곤 퇴치 고민
“서독 정부, 한국 광부 고용 희망”
신응균 대사 귀띔, 탄광에 직접 가
1965년 8월 6일 민주공화당 평의원이었던 김종필(JP) 전 총리가 AID(미국 국제개발처) 차관사업체인 강원도 장성광업소를 방문해 갱목(坑木)들이 좌우에 설치된 지하 갱도에서 안전성을 점검하고 있다. 그보다 2년 전인 63년 7월 초 JP는 한국인 최초로 서독 함보른 탄광 막장을 시찰하고 한국 광부의 파독(派獨)을 추진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63년 7월 초순 서독에 갔더니 신응균 대사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그는 “서독은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정책 추진으로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부족한 노동력을 아프리카, 동남아로부터 충당해 오고 있다. 57년부터 일본에서 매년 400명을 유입해 왔으나 올해 말이면 계약 기간이 만료된다”고 전했다.
신 대사에 따르면 62년 5월 서독의 M·A·N사(社)가 우리 대사관에 한국인 근로자 500~1000명을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고, 63년 5월에는 서독 노동부가 한국인 광부 250명을 고용하겠다고 희망해 와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당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를 맞아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이 절실했다. 노는 인력의 해외 송출도 시급한 때였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본국에서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냐”며 혀를 찼다. 나는 우선 “광부들이 오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신 대사에게 부탁했다. 이튿날 신 대사와 루르 지방에 있는 함보른 탄광으로 갔다. 서독 정부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지하로 수직 1000m, 수평 700m 들어가니 탄광의 막장이 나왔다.
한 시간 후 바깥으로 나왔다. 소매 등을 단단하게 여민 작업복을 입었는데도 온몸 구석구석 탄 찌꺼기가 파고들어 새까맣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사정이니 일본인들이 서독 전역에 3000명까지 와 있다가 나라 경제 사정이 나아지니까 하나 둘 철수해 다 가버렸다고 서독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이집트나 인도·파키스탄 인부들을 쓰자는 말도 나오지만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지런하기는 동양인이 좋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관계자는 “여러 나라의 광부들을 써 보고 있지만 당신 같은 고위 인사가 막장까지 내려가 현장을 체험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 관리들도 그러지는 않았다”며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1963년 8월 중순 JP(왼쪽 둘째)가 서독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본사를 방문해 차량을 살펴보고 있다.
그 후 우리 정부의 움직임은 신속해졌다. 63년 12월 16일 한국과 서독 간 제1차 광부파견 협정이 체결됐다. 12월 21일 제1진 123명 출국을 시작으로 77년 말까지 11년간 7936명의 광부를 서독에 파견했다. 광부 파견은 그때까지 민간 차원의 간호사가 약간 명 나가 있었으나 정부 차원에서 한국의 간호요원 1만32명을 대량으로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은 서독 정부의 기대대로 성실하고 일 잘하고 부지런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64년 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 두 분은 12월 10일 내가 1년 반 전 들렀던 함보른 탄광을 찾았다. 박 대통령 내외와 한인 광부·간호사들은 함께 애국가를 부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북받친 감정이 폭발해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워싱턴에 있었다. 당시 한·일 수교 문제로 또다시 쫓기다시피 나라를 떠나 ‘2차 외유(64년 6월 18일~12월 29일)’ 중에 있었는데 ‘함보른의 눈물바다’ 소식을 듣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무슨 느낌이 통했던 것일까. 박 대통령은 서독 방문 중이던 12월 9일 수행하던 김동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시켜 “연말까지 귀국하라”는 전화 지시를 내렸다. 2차 외유를 해제한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기 위해 덕수(가운데·황정민 분)와 달구(왼쪽·오달수 분)가 함보른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고속도로는 독일이 미국보다 앞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만들었다. 국경선과 접해 있는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싸우려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적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기동성 있게 움직여야 한다는 발상으로 아우토반을 건설했다. 군사용 도로가 전후 산업용 도로가 되고 라인강 기적의 생명줄로 변했다.
65년 나는 공화당 평의원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9월 25일 마지막 인천 연설에 1만여 인파가 모였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신의주로 도로를 연장해 한반도를 종단하는 길을 뚫어야 한다. 어느 날인가, 젊은 사람이 자동차 옆에 연인을 태우고 청춘을 구가하면서 시속 100마일을 질주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궐기하자.”
그러고 서울에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어이, 인천에서 고속도로 얘기했어?”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김형욱 부장)를 시켜 나의 인천 연설을 실시간으로 보고케 한 것이다.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했더니 “그거 내 생각하고 똑같아. 내가 고속도로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거 해야 합니다.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일일 생활권으로 확 바꿔놔야 합니다”라고 했다. 돈 한 푼 없는 신생 독립국이 경부 고속도로라는 국토의 대동맥을 1970년에 완공한 건 기적이었다. 연인을 옆에 태우고 백수십㎞ 속도로 청춘을 구가한다는 꿈과 비전, 신념과 의지가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 소사전 아우토반(Autobahn)=독일의 자동차(auto) 도로(bahn),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망이다. 처음엔 속도 무제한이었으나 현재 대부분 도로가 권장속도 130㎞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됐다. 33년 나치당 집권 뒤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청년실업 구제, 군수·전쟁용으로 건설을 본격화했다. 5년 만에 3000㎞를 확충했으며 오늘날 통일된 독일 곳곳에 1만1000㎞의 도로가 나 있 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