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2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4> 4대 의혹 사건 오해와 진실
6·25전쟁 때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왼쪽) 예비역 대장이 1962년 7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과 나란히 앉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당시 미국 실업인단 대표로 방한, 워커힐 호텔 시설 중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임스 하우스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 워커힐 30년사]
결론부터 말하면 워커힐 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증권파동과 새나라자동차는 정보부 요원이 간여했다. 증권파동에선 정치자금 문제가 발생했으나 새나라자동차에선 그런 문제가 없었다. 빠찡꼬는 5·16 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었다. 육사 5기 출신인 김재춘 3대 중정부장(63년 2월 21일~7월 11일)은 취임과 동시에 4대 의혹사건을 집중 수사해 정보부 요원 등 15명을 구속했으나 이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워커힐 사건 의혹은 호텔 건설 과정에서 건축자재를 면세(免稅)로 들여와 수십억원을 빼내 정당을 만드는 데 썼다는 주장이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워커힐은 62년 3월 초 착공,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지금은 지상 15층 높이의 호텔 등이 들어섰지만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이 4층이었다.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나는 육군 공병대와 군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고, 육·해·공군·해병대의 트럭도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 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돈을 빼 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시 서울공대 교수와 외국 건축 전문가들은 워커힐 공사 비용을 800만~1000만 달러로 계산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통상 들어가는 비용의 5분의 1 정도만 쓴 것이다.
워커힐이란 이름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 Walker·1889~1950) 장군을 기린 것이다. 워커라는 성(姓)에 언덕을 뜻하는 ‘힐(hill)을 붙여 ‘워커의 언덕’이란 뜻으로 내가 작명했다. 워커 장군은 전쟁이 나던 해인 50년 12월 23일 중공군과 맞서 싸우던 서부전선 동두천 북쪽 일대를 정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산 인근에서 한국인 운전병의 실수로 눈 쌓인 골짜기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의 롬멜 장군과 맞서 공을 세우고 대장으로 승진한 뒤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맹장이었다. 호텔과 분리된 워커힐 빌라에는 역대 유엔군 사령관 이름을 붙인 맥아더관, 리치웨이관, 클라크관, 밴플리트관 등을 만들었다.
워커힐은 초기에 건설 취지에 따라 외국인만 출입이 허용돼 주한 미군이 고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방한한 외국 대통령과 총리 등 국빈 투숙과 만찬 연회도 도맡다시피 했다. 워커힐이 개관한 63년 국내 관광 외화 수입이 521만 달러였는데 유엔군이 소비한 액수는 221만 달러로 전체의 43%를 차지했다. 그 대부분이 워커힐에 떨어뜨린 외화다. 얼마 전 오랜 지인 한 분과 워커힐 한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그랬다. “내가 만들고도 안팎으로 의혹이다, 유혹이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 욕 좀 먹으면 어떠냐, 내 살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1962년 8월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중앙포토]
나는 당시 보고를 받지 못했고 액수가 얼마인지도 몰랐다. 수많은 투자자가 막대한 피해를 본 증권파동에 대해 이 사건에 개입한 부서의 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 선의로 출발했고 내가 몰랐다 하더라도 정보부가 무리한 일을 벌여 국민에게 고통을 준 건 사실이다.
새나라자동차를 기획한 사람도 나다. 당시 동양에서는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가 일본뿐이었다. 일본에서 적당한 차를 가져와 자동차 공업을 일으키고 외국인 관광객도 유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일본 닛산을 찾아가 실마리를 텄다. 61년 12월 정부는 일본 닛산의 소형차 블루버드를 부품 형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 시판하기로 했다. 우선 관광용으로 블루버드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하기로 했다. 당시 재일교포 실업가 박노정씨가 전체 자본금 1억원 중 30%를 대고, 70%는 은행융자로 해서 새나라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부평에 연간 6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65년 6월 22일 조인)가 되기 전이라 박노정씨가 대겠다는 자금을 국내로 들여올 수 없었다. 한·일 수교 뒤 들여오는 조건으로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공장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박노정씨가 “돈을 못 대겠다”며 손을 들어버렸다. 박씨는 그동안 800만원만 댔고 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이 때문에 새나라자동차는 63년 5월까지 2700여 대 차를 생산하고 중단했다. 회사가 망한 것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은 내가 공장 설립과 차량 생산 과정에서 20억원의 정치자금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의혹도 부정도 있을 수 없다. 돈을 대던 사람이 미국으로 도망간 판에 어떻게 수십억원을 빼돌릴 수 있겠는가.
어쨌든 새나라자동차는 뒤에 국산 자동차 생산에 불을 붙였고, 오늘날 세계 4~5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부평공장에서 조립한 새나라자동차 1호차가 나왔을 때의 추억이 있다. 62년 8월 27일이다. 내가 부평에서 직접 운전해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옆에 모시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늦은 해가 진 뒤 종로에는 동대문까지 가로등(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이런 가로등이 시내 도로 전체에 세워져 불을 밝힐 때가 언제쯤일까. 불 켜진 가로등을 보니 환하고 좋네…”라며 웃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전기도 가로등도 없던 시절의 풍경이다. 정치에선 동기보다는 나타난 결과가 중요하다는 점을 난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의혹’이란 글자가 붙은 일이 국민을 일시나마 괴롭혔던 결과에 대해 나 자신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