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1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3> 현대식 정당을 만들다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서울역 앞 민주공화당사에서 입당원서에 서명한 뒤 정구영 초대 총재와 나란히 앉아 있다. 박 의장의 당적번호는 70만 6611번이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자신의 추천인인 정 총재에게 “무슨 사고가 나면 추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이튿날 박 의장은 3차 전당대회에 참석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정식으로 수락하고 후임 총재에 추대됐다. [중앙포토]
민주공화당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청람(靑嵐) 정구영(鄭求瑛·1896~1978·충북 옥천 출신) 선생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였다. 지조를 절대 꺾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깨끗하게 지키는 그런 선비 말이다. 그런 분이 우리 정치사에 다시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정구영 선생을 처음 만난 건 5·16혁명 직후였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인 정 선생을 포함해 몇몇 변호사를 오찬에 모셨다. 그는 꼿꼿한 법조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4·19가 일어나자 서슬 퍼렇던 자유당 정권 아래서 대통령 하야 요구 성명을 발표한 인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혁명을 왜 하게 됐는지에 대해 열의에 차 설명했다. 정 선생은 그때 내 얘기를 듣고 ‘좀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혁명을 끌고 나가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던 듯했다.
1963년 1월 1일 최고회의가 금지했던 정당활동을 허용했다. 창당 작업에 참여한 윤천주·김성희 교수가 한목소리로 정 선생을 우리 당에 모시자고 했다. “아주 고지식하고 연만(年晩)하셔서 세상 물정을 다 아시는 그런 분이 당의 리더가 되면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정 선생은 함께 정치를 하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한 뒤였다. 공화당 발기인이었던 의학박사 김성진·윤일선씨가 정 선생의 북아현동 집으로 찾아가 설득했는데, 참신하고 양심적인 새 인물을 모아 신당을 만든다는 우리의 계획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아마도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 선생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참신한 내일에 대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일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월 12일 그가 김동환 전 주미공사의 안내로 태평로 삼영빌딩 3층에 있던 가칭 재건당 창당 준비 사무실에 왔다.
그 자리에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정 선생과 나는 의기투합했다. 67세와 37세라는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린 서로 잘 통했다. 우리는 “세상이 이래가지고 되겠느냐”며 정치에 대해 한참 토론했다. 정 선생은 나를 보고 “이런 사람이 혁명세력에 있었느냐”며 반가워했다. 그는 “혁명을 잘했다. 그런데 처리를 잘해야지, 뒤처리를 잘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이어 “내가 미력을 보태겠다. 같이 하자”고 했다. 그때 내가 정 선생에게 건넨 말이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한 분 남은 선비가 바로 선생님이십니다”였다. 그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만든 신당은 한국엔 없던 현대식 정당이었다. 가장 큰 특징이 사무국과 원내(院內)를 나눈 이원(二元) 조직이란 점이었다. 정치학 교수(윤천주·김성희·강상운)들이 각국의 정당조직과 영국 등 선진국 정당의 모델을 연구해 내놓은 안이었다. 우리나라엔 그 전까지 정당다운 정당이 없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에 정당이라고 있었지만 조직 기반이 없는 이름뿐의 정당이었다. 사당(私黨) 몇 개가 모여 정당이랍시고 이름을 내걸었다. 명실상부한 공당(公黨)을 만들기 위해 신당은 국회의원과 사무국을 분리하고, 원외(院外)의 사무국이 당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했다. 사무국은 창당정신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한 기반이었다.
비례대표제라는 새로운 선거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나는 윤천주·김성희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혁명 주체 대부분이 이북 출신 실향산민(失鄕散民)입니다. 국회의원을 시키려고 해도 당선될 만한 연고지가 없습니다. 이들이 국회의원이 돼 같이 갈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두 교수가 “비례대표제라는 게 있다”고 아이디어를 줬다. 설명을 듣고서 나는 “참 좋은 생각이다. 실향산민을 구제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후에 비례대표제를 채택할 때 명분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을 국회에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이북 출신 혁명동지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목적이 더 컸다.
62년 12월 23일 워커힐 호텔에서 최고위원 송년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영근 정보부 차장과 함께 ‘재건동지회’ 현황을 브리핑했다. 1년간 비밀리에 추진해온 신당 사전조직의 전모를 처음으로 최고회의에 공개한 것이다. “신년도 정치활동 재개를 앞두고 혁명이념을 주체적으로 추진할 조직을 사전에 짜놓아야 했다.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어 극비리에 조직했으니 양해 바란다”면서 신당의 골격을 설명했다.
브리핑과 질의응답이 끝나고 만찬이 시작되자 몇몇 최고위원이 들고 일어났다. 김동하·김재춘·오정근·강상욱 등이 거세게 항의했다. “네가 뭔데 우리를 좌지우지하느냐” “너 혼자 막 뛰는데 우리는 뭐냐”며 고함이 오가면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내가 “여러분 가운데 지역적 기반이 없는 분이 많다. 그래서 비례대표제라는 걸 연구해냈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려고 이런 엉터리 같은 제도를 만들려고 하느냐” “우리를 그리로 내쫓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따졌다. 비례대표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국 조직을 두고서도 트집을 잡았다. “사무국은 결국 공산당의 서기국이다” “공산당 조직을 그대로 베꼈다”고 공격해댔다.
1963년 1월 18일 서울 조선호텔 그랜드홀에서 민주공화당 발기인총회가 끝난 뒤 78명의 발기인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맨 앞줄 가운데(왼쪽 아홉째)가 김종필(JP) 발기위원장, 그 왼쪽이 정구영 부위원장이다. 원로 변호사인 정구영은 JP가 1차 외유를 떠난 이튿날인 2월 26일 공화당 초대 총재로 선출됐다. [중앙포토]
혁명세력의 분열이었다. 이북파·장군파·대령파로 갈라진 혁명세력이 거의 다 ‘반(反)김종필’이었다. 일개 중령 출신이 나서서 일을 벌이자 대령·장군급들은 배 아파했다. 이들과 일부 강경파가 똘똘 뭉쳐 나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나섰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최고위원 5명(김동하·김재춘·오정근·강상욱·이석제)을 신당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이들을 포함한 78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민주공화당 발기인 총회가 1월 18일 서울 조선호텔 그랜드홀에서 열렸다. 나는 직접 쓴 창당 발기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제 이 땅의 민족은 숨 가쁘게도 새 질서를 요구한다. 새 질서는 새 힘의 소유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 힘이란 올바른 세계관과 민족혼을 토대로 한 새로운 이념 아래 과학적인 정치경륜으로 새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지도력을 이름이다.…이 모든 것은 결코 과거와 같이 국민과 유리된 사리사욕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진실로 국민 대중과 이해를 같이하고 호흡을 같이하는 새로운 정치대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과거의 정당처럼 말만 하는 정당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하는 정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다운 정열과 의욕과 실천으로 반드시 이 땅에 명랑한 복지사회를 세우고 말 것이다.” 이날 발기위원장엔 내가, 부위원장엔 정구영 선생이 선출됐다.
창당작업이 급물살을 탔지만 최고회의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나섰다. 박 의장은 “당 만드는 일은 김 부장이 나한테 사전에 보고하고 허락받고 한 것이다”고 달래도 보고 “누가 당을 만들든 최고위원들이 왜 간섭이냐. 최고위원들은 당 만드는 데 간섭하지 말라”고 야단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의장이 수습안을 내놔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잠시 수그러드는 듯하다가 뒤에 더 심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게 반대했던 최고위원 중 상당수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공산당 조직’이라고 공격받던 사무국 체제는 이후 50년 동안 거의 모든 정당이 따라 하는 모델이 됐다. 비록 그때 내가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정리=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