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5-9-4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저기 나와 똑같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걸어온다. 여자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민망해하며 세상 여자들을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로 나눈다. 걷다 보니 나무로 만든 데크가 나온다.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 저 아래 개천을 바라본다. 검은 물이 흘러간다. 반팔 와이셔츠에 감색 바지를 입은 두 남자가 다가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점심시간이구나, 나는 그들이 근처에 있는 관공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자리를 떠나며, 세상 사람들을 부주의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 불쾌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눈다.
오솔길 막바지에 계단이 대여섯 개 나타난다. 운동복을 입은 아저씨가 계단 앞에 엉거주춤 서 있다. 가까이 가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을 건넨다. 음악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본 척 후다닥 계단을 내려간다. 아저씨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인 듯 보였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말을 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낯선 사람의 손을 잡느니, 기꺼이 나쁜 사람이 되기로 한다. 이제 세상은 경계심 없고 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불안하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나뉜다.
오솔길을 벗어나니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가 나타난다. 붉은 신호등 아래 서서 자동차들을 바라본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는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물론 주인공은 나다. 문득 깨닫는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내가 주인공인 단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음을. 주위를 둘러본다. 쇼핑백을 들고 서 있는 여자,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가 나란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겠지만, 나에게는 지나가는 사람1, 2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주인공이기도 하고 엑스트라이기도 한 채 살아가고 있구나.
부희령(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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