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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막장'과 古典 사이

바람아님 2015. 9. 1. 08:32

(출처-조선일보 2015.09.01 김소희 배우·연희단거리패 대표)


김소희 배우·연희단거리패 대표 사진식당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한창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걸 왜 보는 거지?" 

"정말 인간적이잖아~ 감정의 바닥까지 보여주잖아!" 뭐야, 막장이 인간적이라고? 

충격을 받은 나는 '인간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새삼 의심을 품게 되었다.

희랍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가 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은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만히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진작 폐기처분되지 않고 몇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고전으로 일컬어지며 

쉼 없이 공연되는 것일까. 

우리 TV 드라마 전형적인 소재인 출생의 비밀과 복잡한 가족관계, 얽히는 결혼 같은 요소들이 이 이야기의 출발이다.

나라에 재앙이 닥치고 백성들이 고통으로 아우성칠 때, 신탁은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찾아서 추방하라고 한다. 

오이디푸스는 그자를 찾아내리라는 약속을 하는데,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두려워하며 그에게 충고한다. 

"그냥 덮어두라"고, "지금 와서 진실을 들추어 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그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진실을 향해 질주한다. 

진실의 끝에 당도하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그는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기 눈을 찌르고 스스로를 황야로 추방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운명을 알아가고 그것에 대항하는 오이디푸스는 의연하지 않다. 

이성을 잃기도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과 대면하고 고통을 통해 성찰에 이르는 이 '인간적인' 과정 때문에 

이 작품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막장이 아니라 시간을 이겨낸 고전이 된 것이다.

'인간적'이란 말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말 뒤에 숨어서 무기력과 게으름과 비겁함을 용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황야를 헤매는 오이디푸스를 떠올린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가'라고.



※ 9월 일사일언은 김소희씨를 비롯해 민규동 영화감독, 남무성 재즈평론가, 팀 알퍼 칼럼니스트, 

   박은영 KBS 아나운서가 번갈아 집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