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학자 위백규(1727~1798)는 난신적자, 즉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권세’ 때문이라 했다. 혜강 최한기(1803~1877) 역시 “난신적자는 백성을 잘 다스리기보다는 오로지 부의 축적과 개인의 영달을 좇을 뿐”(<인정> ‘용인문’)이어서라 했다. 여말선초 학자 야은 길재(1353~1419) 역시 “난신적자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야은일고> ‘서문’)고 했다.
난신적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1548년(명종 3년) 영의정 윤인경 등은 선왕(중종) 때 국정을 농단했던 김안로의 잔당을 겨냥, “난신적자는 설령 1000년 전의 일이라도 반드시 추적해서 처단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심지어 “(난신적자의) 썩은 해골이라도 주벌할 수 있으며, 구족(九族)을 다 죽여야 한다”(성종 때 대사헌 한치형 등)고까지 했다. 난신적자 처벌에 공소시효란 없으며, 그 처벌 또한 극형이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2500년 전 공자가 역사서 <춘추>의 편찬에 인생의 황혼기를 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자(사진)는 <춘추>에서 당대의 인물과 정치에 시시비비를 가려 엄정한 평가를 내렸다. 만약 공자의 ‘춘추대의’에 어긋나는 자는 난신적자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랬으니 “공자가 <춘추>를 짓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맹자> ‘등문공’)는 말이 나왔다. 공자의 뜻은 훗날의 군주들이 <춘추>를 교훈으로 삼아 참된 정치를 펼치라는 것이었다. 공자를 존경한 사마천 역시 정의가 사라지고 난신적자가 판치는 세태를 한탄하며 <사기>를 저술했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살피기 위함(述往事 思來者)’이었다. 물론 난신적자만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인용, “군자(위정자)란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했다(<사기> ‘백이열전’).
이렇게 세상은 역사를 두려워하는 자와,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자 등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최근 유수한 역사학자들이 모여 ‘반헌법 행위자 열전’을 편찬할 계획을 밝혔다. 헌법을 파괴 유린한 ‘난신적자를 가리는 작업’이라 했단다. 대상자가 200~300명이라니 밤잠 못 이룰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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