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09.04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빌리는 놈 바보, 빌려주는 놈 바보,
돌려달라는 놈 바보, 돌려주는 놈 바보
(借一痴, 借二痴, 索三痴, 還四痴)."
책 빌리기와 관련해 늘 우스개 삼아 오가는 네 가지 바보 이야기다.
당나라 때 이광문(李匡文)이 '자가집(資暇集)'에서 처음 한 말이다.
송나라 때 여희철(呂希哲)도 '여씨잡기(呂氏雜記)'에서
"책을 빌려 주는 것과 남의 책을 빌려와서 돌려주는 것은 둘 다 바보다
(借書而與之,借人書而歸之,二者皆痴也)"라고 했다.
한번 이 말이 유행한 뒤로 천하에 남에게 책을 빌려주려 들지 않는 나쁜 풍조가 싹텄다.
공연히 귀한 책을 빌려주고 나서 책 잃고 사람 잃고 바보 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아서다.
명나라 때 육용(陸容)이 격분해서 말했다.
"책을 남에게 빌려줌은 인현(仁賢)의 덕이다. 책을 빌려놓고 돌려주지 않음은 도적의 행실이다.
어찌 바보로 지목할 수 있는가?" 백 번 지당한 말이다.
남의 귀한 책을 빌려다가 떼어먹은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것은 빌려준 사람의 후의를 짓밟는 파렴치한 짓이다.
책 빌려준 것은 생각나는데 정작 당사자가 생각나지 않을 때, 빌려 줄 당시 바로 돌려줘야 한다고 당부까지 한 기억마저
생생하면 신의를 저버린 데 대한 분노는 물론, 당장에 찾고 싶은 내용을 볼 수 없는 답답함에 화가 난다.
이광문의 한마디 말이 책 안 돌려주는 자에 대한 면죄부가 된 셈이니, 그 말의 해독이 더없이 크다.
실은 이 네 가지 바보 이야기는 원래 뜻과는 정반대로 오해된 표현이다.
남송 때 엄유익(嚴有翼)은 "옛날에는 책을 빌릴 때 술병(치·希瓦)에 술을 채워서 갔다.
책 빌릴 때 나오는 두 '치(痴)'자는 '치(希瓦)'자로 써야 맞는다"고
했다. 고대에는 책을 빌리러 갈 때 부탁의 뜻으로 술 한 병을 들고 가고, 책을 돌려줄 때 감사의 표시로 다시 술 한 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술병을 뜻하는 '치(希瓦)'자가 누군가의 장난으로 음이 같은 바보란 뜻의 '치(痴)'로 바뀌었고,
이 말이 퍼지면서 이런 경박한 풍조를 양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입증할 용례가 옛 문헌에 많이 나온다.
망문생의(望文生意)! 글자만 보고 제멋대로 풀이한 해독의 여파가 자못 크다.
빌린 책은 술 한 병 들고 가서 예를 갖춰 돌려주는 것이 맞는다.
술은 없어도 좋으니, 좋은 말 할 때 빌려간 내 책도 돌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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