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선조실록>),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통탄스럽다”(<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상반된 인물평이다. 광해군대 이이첨 등 대북파가 쓴 <선조실록>과, 인조반정 후 34년에 걸쳐 고친 <선조수정실록>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정권의 입맛대로 이렇게 정반대의 포폄(褒貶)이 이뤄지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사실 <선조실록>은 처음부터 부실논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사관들이 사초책을 불태우고 줄행랑치는 바람에 선조 즉위년(1567년)~임란 발발(1592년) 사이의 기록이 몽땅 사라졌다. 게다가 <선조실록>을 편찬한 기자헌·이이첨 등 대북파가 사필을 움켜쥐고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면서, 한편으로는 명망대신들을 마구 비방했다. 그러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적신(賊臣)의 수괴’(기자헌·이이첨)가 편찬한 <선조실록>이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을 쓴 이식·채유후 등 역사가들이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원본 <선조실록>을 폐기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수정본을 제작하면서 삼은 전범은 송나라 ‘주묵사(朱墨史)’였다. ‘주묵사’는 송나라 사관 범충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썼던 기법이다. 원문은 검은 글씨, 뺄 것은 노란 글씨, 새로 삽입할 부분은 붉은 글씨로 기입했다. 물론 이식·채유후 등은 주묵사를 따라하지 않았다. 대신 ‘수정본’ 평가를 후대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는 ‘주묵사의 정신’만을 취한 것이다.
이식과 채유후는 “실록의 신·구본을 모두 보존하여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묵사가 남긴 뜻”이라 했다(<선조수정실록> 등). 즉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잘못된 역사를 고친다면서 애써 수정본을 만들어놓고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놓은 그 ‘쿨’한 기상이란….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상반된 내용을 흥미진진 읽고 있다. 나름의 해석을 가하면서….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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