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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창] 우리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

바람아님 2015. 10. 28. 09:29

(출처-조선일보 2015.09.14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역사상 가장 비싸고 거대한 실험이 民主主義 수호했듯
지켜야만 할 대한민국 위해 인재와 자원을 총동원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國防기술 개발할 순 없는가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사진1939년 8월 2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는다. 시간과 중력의 비밀을 밝혀낸 천재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그가 루스벨트에게 쓴 편지는 놀랍게도 우주의 비밀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아니었다. 

평생을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 살았던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나치 독일 물리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전 미국이 먼저 핵폭탄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사인을 했지만, 

사실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와 수학자 유진 위그너가 대부분 작성해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라고도 

알려진 이 편지는 추후 미국, 영국,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이름 아래 핵폭탄 개발을 가능하게 한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인슈타인, 실라르드, 위그너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불변의 진실? 가끔 전쟁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인들의 속담이 있고,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너는 전쟁에 관심 없더라도, 전쟁은 너에게 관심이 매우 많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은 소규모였다. 

불과 몇 십명의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매우 적은 예산을 갖고 핵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연구했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잘 준비된 나치 독일의 전쟁 기계 앞에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마저 침략의 위기에 

빠지기 시작한 순간, 미국은 모든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한다. 1945년에만 13만명의 인원과 오늘날 화폐가치로 30조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됐다. 자칫 잘못됐으면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민주주의.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싸고 거대한 물리학 실험을 통해 민주주의의 죽음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연평도 해전,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DMZ 지뢰 매설. 끝없이 반복되는 도발들. 언제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물론 아무도 전면전을 원할 리 없고, 치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평화가 전쟁보다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최대한 가능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지, '평화'라는 이름 하나가 

모든 독재와 불공평을 정당화하는 미래는 아닐 것이다. 전쟁이 만물의 아버지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물론 난센스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적어도 가끔 평화의 아버지가 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서서히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뜬금없이 갑자기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말이 아니다. 수천 문의 장사정포, 탐지 불가능한 수십 척 잠수함, 스위스 치즈같이 뚫려있는 DMZ, 

청와대까지 날아오는 드론. 왜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탐지 불가능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지 우리는 여러 번 들어봤다. 

하지만 한번 솔직해 보자. 수십조원을 투자해 강을 파고 신도시는 개발한 적 있지만, 우리는 한 번도 대한민국의 모든 자원과 

인재를 총동원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국방 기술을 개발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완벽하지 않다. 역사적 정당성을 질문할 수 있고, 아직 우리 민주주의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반도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여당과 야당,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동성연애자와 이성연애자가 각자의 선호도를, 목숨의 위협 없이 주장하고 옹호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왔다. 

충분히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볼 만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