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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창] 인터넷, 망각과 용서를 날려버린 판도라의 상자

바람아님 2015. 10. 29. 19:07

(출처-조선일보 2015.10.28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고향 등진 21세기 난민들에게 식량 확보보다 휴대폰 충전이 우선… 구글 지도 보며 안전한 길 찾아내
인터넷으로 편안함·혜택 누리지만 비밀과 잊힘이 불가능해져… 기술의 양면성 잊지 말아야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등에 업힌 어린아이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아이는 피난 중에 엄마·동생과 헤어졌다. 
며칠 동안 잠 한 번 제대로 자보지 못한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아이를 등에서 내려놓지 못한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터키, 그리스, 헝가리로 피난 가는 난민들의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류의 영원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의 조부모님들은 먼 훗날 우리의 부모가 될 어린 아이들을 업고 피난길에 
나섰다. 2000년 전 가뭄과 훈족(族)을 피해 로마 국경에 몰려든 게르만인들은 주린 배를 채울 
개 한 마리 값으로 아내와 딸을 로마 병사에게 팔았다. 7만5000년 전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이주한 호모 사피엔스. 
그들의 후손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찾아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걸까?

시리아 난민들은 과거의 많은 피난민과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바로 발달한 IT 기계들이다.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식량과 외화는 잃어버리더라도, 스마트폰 하나만은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다. 
물과 식량의 확보보다 휴대폰 충전을 먼저 하고 무선 인터넷망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구글이 제공한 지도를 보며 가장 안전한 피난길을 찾고, 기차와 버스 노선을 검색한다.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 그리고 먼저 안전한 서유럽으로 피난 간 형제들과 SNS를 통해 소통한다. 
지중해에서 뒤집힌 배, 며칠 동안 헝가리 국경을 넘지 못한 채 기차 안에 갇혀 있는 난민들, 아이들의 끝없는 울음소리. 
이 모든 장면은 인터넷에 올려진다. 덕분에 헝가리 국경선이 통제되었다는 소식을 불과 수십 분 만에 피난민 대부분이 
알게 되고, 독일에 도착해서도 절대 과거 동독 영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리아 난민만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이스라엘 동료를 갑자기 무자비하게 찔러버리는 아랍 노동자,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해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우선 총부터 쏘고 보는 이스라엘 군인들, 테러리스트라는 오해로 
총에 맞아 숨져가는 아프리카 난민을 폭행하는 '평범한' 이스라엘 시민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덕분에 1분 후면 
지구인 모두가 볼 수 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기에, 아랍인은 자신의 무력함에 더욱더 분노하고, 이웃과 동료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이스라엘 시민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상상을 초월한 편안함과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손바닥 위에 있는 작은 기계 하나로 
그리운 가족과 통화하고, 야식을 주문하고, 지구의 모든 지식을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 하나를 열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비밀과 잊힘이 지구에서 불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잊힘이 없다면 용서와 자비도 불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국과 일본, 미국과 이란, 러시아와 폴란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파키스탄과 인도가 
용서나 자비를 모르고 충돌만 하는 세상은 끔찍하다. 물론 과거의 만행과 불공평을 잊으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자비와 용서 없이는 결국 둘 중 하나가 전멸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반성과 연민 없는 세상은 미래가 없는 세상이다.

대부분 과학자와 공학자는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하고, 성(性), 인종, 종교, 민족, 성적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본인의 능력과 공로만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류의 행복과 편안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동시에 언제든지 인류에게 불행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