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10-26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1>통신사는 왜 일본으로 갔나
《 고대에서 임진왜란까지 한일교류 현장을 구석구석 훑었던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2부 조선통신사 편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상흔이 깊었던 일본은 재건을 위해서는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가 필수적이라는 판단 아래 교류를 희망합니다. 이에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통해 교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통신사는 두 나라의 불신과 반목이 가장 극에 달했던 때 친선과 평화를 상징했던 공식 외교 사절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수교 50년을 맞은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된 올해 안타깝게도 사사건건 대립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제 올해도 서서히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 요즘, 과거 선조들의 평화의 메시지를 되새기면서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모색해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2부를 시작합니다. 마침 한국에서는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이,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연고지 15개 지방자치단체 및 관련 단체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연고지 연락협의회’가 공동으로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박물관에서는 12월 6일까지 ‘조선시대 통신사와 부산’전을 여는 등 다양한 행사도 치러지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에도 조금씩 훈풍의 기운이 퍼지는 듯합니다. 일찍이 교류에 앞장섰던 조상들의 흔적을 밟으며 한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려 합니다. 》
일본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吳) 시에 있는 둘레 16km에 불과한 시모카마가리 섬 마을은 날씨가 따뜻해 겨울에도 밀감이 나오고 해초를 넣어 만든 소금이 특산물인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랑하는 기념관이 하나 있으니 바로 ‘조선통신사 자료관’이다. 일본 곳곳에는 조선통신사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자료관이 많으나 규모가 크기로 유명하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았던 때는 올해 9월 중순.
일본어로 고치소이치반칸(御馳走一番館)이라 불리는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쓰시마 섬(對馬島·대마도)에 도착한 통신사 선박들이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大阪)로 갈 때 거쳤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는 모습을 그린 여섯 개의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로 길이만 총 8m가 넘는 대작이다.
신원 미상의 일본 화가가 그렸다는 그림들을 자세히 보니 조선통신사 선박 한 척이 불에 타는 두 번째 그림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연으로 저렇게 활활 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은 영조 24년인 17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일본 배를 내준 사람들
그해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항에서 출발해 첫 도착지인 쓰시마 섬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 고요했던 와니우라(鰐浦) 앞바다가 아수라장이 됐다. 정박해 있던 통신사 선박 한 척이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것이다.
오가와 에이지(小川英史) 학예사는 “당시 쓰시마 섬 측 기록에 따르면 배 안 짚에 촛불이 붙어 화재가 났다”며 “통신사 일행 중 13명이 죽거나 다쳤고 인삼 72근, 무명 20필 등도 모두 불에 탄 큰 화재였다”고 했다.
통신사들의 행로에 당장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위급 상황이었지만 쓰시마 섬 측은 황급히 다른 일본 배를 내주었고 일행은 무사히 목적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향할 수 있었다. 당시 일행이었던 조명채는 ‘짐배로 바꿔 타려 했으나 어느 배도 튼튼하지 않아…쓰시마 섬에서 큰 왜선 한 척을 빌려줬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들이 통신사들을 얼마나 극진하게 환대했는지는 히로시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썰물 때는 수심이 얕아 배를 대는 것이 어렵게 되자 번주(藩主)였던 후쿠시마 도리요리는 별도 접안 시설인 계단식 선착장(간기)까지 만들었다. 번주의 이름을 따 ‘후쿠시마 나가간기’라고 불리는 이 흔적들은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마을 곳곳에도 남아 있었다.
당시 번주들은 조선 배 1척에 일본 배 4척씩 배정해 길을 인도했다고 한다. 예인선뿐 아니라 안내선과 물품을 나르는 배까지 100여 척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어떤 연유로 일본에 가게 된 것일까.
○ 400여 년 전 공식 외교사절단
조선과 일본 간 7년 전쟁(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일 국교 회복에 주력했다. 동아시아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전쟁에 피폐해진 일본을 재건하는 게 발등의 불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쓰시마 번에 평화교섭 개시를 직접 명령하는 한편 조선의 요구에 따라 7년 전쟁을 사죄하는 국서와 함께 조선 왕릉을 범한 자를 체포해 보내기까지 한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무려 204년에 걸친 교류였다.
통신사 행렬은 보통 선박 6척에 400∼50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행렬은 쓰시마 섬과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바닷길로,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강길을 따라, 교토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육로와 해로가 반복되는 편도로만 평균 10개월∼1년이 걸리는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다.
에도 막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통신사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숙박을 위해 절을 증축한 곳이 부지기수이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연결해 넓은 다리까지 따로 만들어줬다. 사찰에서는 통신사들을 대접하기 위해 금지 품목인 고기를 반입하기까지 했다. 체재비용은 모두 일본이 부담했다.
○ 원조 한류 전도사
조선통신사는 오늘로 치면 ‘한류 전도사’들이었다. 대부분 문장 글씨 그림에 능한 문인들이어서 자연히 학술과 문예의 교류가 이뤄졌다.
9월 초 들른 도쿄에서 가까운 시즈오카(靜岡) 현 시즈오카 시에 있는 사찰 청견사(淸見寺·세이켄지)는 통신사들이 단골로 묵었던 사찰이다. 여기에는 통신사들이 남긴 시문(詩文)들이 소중하게 전해져 온다.
이치조 후미아키(一條文昭) 주지는 통신사들이 쓴 원본 글씨가 한 장 한 장 가지런히 담긴 나무 상자를 기자에게 열어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1711년 통신사로 왔던 남성중이 56년 전인 1655년 역시 통신사로 왔던 부친이 남긴 글을 발견하고 ‘청견사에서 남긴 시운을 울며 따라 짓다’라는 글도 있었다. 선조들의 체온이 직접 닿았던 유물들을 보니 400년 전 조상들이 살아 있는 듯 눈앞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에도 막부 시절이었기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일본 대중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외국 사신들의 행렬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가는 길목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통신사가 묵고 있다고 알려지면 글이나 그림을 받으려는 일본인들이 줄을 서는 바람에 통신사들이 밤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조선통신사는 인삼 재배법과 동의보감을 기초로 한 의술 등 각종 전문 지식도 전했다.
○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들
이번에 취재진이 2주에 걸쳐 쓰시마 섬에서 도쿄까지 통신사들이 다닌 중요 지점들을 답사하면서 놀란 것은 이들이 남긴 흔적들이 매우 광범위하고 깊게 일본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쓰시마 섬은 아예 섬 전체가 통신사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고 교토 북동쪽의 비와(琵琶) 호수 연안에는 아직도 통신사가 다녔던 길이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통신사가 간 적이 없는 홋카이도 같은 곳에서까지 갓을 쓴 통신사 인형이 팔릴 정도였다.
지바 현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구루시마 히로시 관장은 “조선통신사의 의의는 매번 그 행렬이 일본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조선 사람을 직접 본 일본 대중이 그들에게 매우 호의를 가졌다는 데 있다”고 했다.
취재 기간 중 만난 일본 관계자들은 귀중한 그림과 글들의 원본을 아낌없이 공개하며 환대했다.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우리는 ‘조선통신사’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일 두 나라의 깊은 인연을 확인했다. 바로 그런 과정이야말로 400여 년 전 선조들이 지금의 후손들에게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2부 조선통신사의 길]<1>통신사는 왜 일본으로 갔나
시모카마가리의 조선통신사 자료관인 고치소이치반칸이 소장하고 있는 총 가로세로 824.9×14.5cm의 대형 그림인 ‘조선통신사 접대선 행렬도’. 모두 6편의 그림 중 조선통신사 선박 한 척이 화재로 불에 타는 모습을 그린 두 번째 편이다. 통신사들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항해 일정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쓰시마 섬 측에서 황급히 배를 제공해 주어 무사히 목적지인 에도(지금의 도쿄)에 닿을 수 있었다. 고치소이치반칸 제공
일본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吳) 시에 있는 둘레 16km에 불과한 시모카마가리 섬 마을은 날씨가 따뜻해 겨울에도 밀감이 나오고 해초를 넣어 만든 소금이 특산물인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랑하는 기념관이 하나 있으니 바로 ‘조선통신사 자료관’이다. 일본 곳곳에는 조선통신사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자료관이 많으나 규모가 크기로 유명하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았던 때는 올해 9월 중순.
일본어로 고치소이치반칸(御馳走一番館)이라 불리는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쓰시마 섬(對馬島·대마도)에 도착한 통신사 선박들이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大阪)로 갈 때 거쳤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는 모습을 그린 여섯 개의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로 길이만 총 8m가 넘는 대작이다.
신원 미상의 일본 화가가 그렸다는 그림들을 자세히 보니 조선통신사 선박 한 척이 불에 타는 두 번째 그림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연으로 저렇게 활활 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은 영조 24년인 17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항에서 출발해 첫 도착지인 쓰시마 섬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 고요했던 와니우라(鰐浦) 앞바다가 아수라장이 됐다. 정박해 있던 통신사 선박 한 척이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것이다.
오가와 에이지(小川英史) 학예사는 “당시 쓰시마 섬 측 기록에 따르면 배 안 짚에 촛불이 붙어 화재가 났다”며 “통신사 일행 중 13명이 죽거나 다쳤고 인삼 72근, 무명 20필 등도 모두 불에 탄 큰 화재였다”고 했다.
통신사들의 행로에 당장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위급 상황이었지만 쓰시마 섬 측은 황급히 다른 일본 배를 내주었고 일행은 무사히 목적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향할 수 있었다. 당시 일행이었던 조명채는 ‘짐배로 바꿔 타려 했으나 어느 배도 튼튼하지 않아…쓰시마 섬에서 큰 왜선 한 척을 빌려줬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들이 통신사들을 얼마나 극진하게 환대했는지는 히로시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썰물 때는 수심이 얕아 배를 대는 것이 어렵게 되자 번주(藩主)였던 후쿠시마 도리요리는 별도 접안 시설인 계단식 선착장(간기)까지 만들었다. 번주의 이름을 따 ‘후쿠시마 나가간기’라고 불리는 이 흔적들은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마을 곳곳에도 남아 있었다.
당시 번주들은 조선 배 1척에 일본 배 4척씩 배정해 길을 인도했다고 한다. 예인선뿐 아니라 안내선과 물품을 나르는 배까지 100여 척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어떤 연유로 일본에 가게 된 것일까.
○ 400여 년 전 공식 외교사절단
조선과 일본 간 7년 전쟁(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일 국교 회복에 주력했다. 동아시아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전쟁에 피폐해진 일본을 재건하는 게 발등의 불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쓰시마 번에 평화교섭 개시를 직접 명령하는 한편 조선의 요구에 따라 7년 전쟁을 사죄하는 국서와 함께 조선 왕릉을 범한 자를 체포해 보내기까지 한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무려 204년에 걸친 교류였다.
통신사 행렬은 보통 선박 6척에 400∼50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행렬은 쓰시마 섬과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바닷길로,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강길을 따라, 교토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육로와 해로가 반복되는 편도로만 평균 10개월∼1년이 걸리는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다.
에도 막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통신사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숙박을 위해 절을 증축한 곳이 부지기수이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연결해 넓은 다리까지 따로 만들어줬다. 사찰에서는 통신사들을 대접하기 위해 금지 품목인 고기를 반입하기까지 했다. 체재비용은 모두 일본이 부담했다.
이치조 후미아키 청견사 주지가 가리키고 있는 본당 앞 편액 대부분은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글과 시들을 적어 만든 것이다. 시즈오카=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조선통신사는 오늘로 치면 ‘한류 전도사’들이었다. 대부분 문장 글씨 그림에 능한 문인들이어서 자연히 학술과 문예의 교류가 이뤄졌다.
9월 초 들른 도쿄에서 가까운 시즈오카(靜岡) 현 시즈오카 시에 있는 사찰 청견사(淸見寺·세이켄지)는 통신사들이 단골로 묵었던 사찰이다. 여기에는 통신사들이 남긴 시문(詩文)들이 소중하게 전해져 온다.
이치조 후미아키(一條文昭) 주지는 통신사들이 쓴 원본 글씨가 한 장 한 장 가지런히 담긴 나무 상자를 기자에게 열어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1711년 통신사로 왔던 남성중이 56년 전인 1655년 역시 통신사로 왔던 부친이 남긴 글을 발견하고 ‘청견사에서 남긴 시운을 울며 따라 짓다’라는 글도 있었다. 선조들의 체온이 직접 닿았던 유물들을 보니 400년 전 조상들이 살아 있는 듯 눈앞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에도 막부 시절이었기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일본 대중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외국 사신들의 행렬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가는 길목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통신사가 묵고 있다고 알려지면 글이나 그림을 받으려는 일본인들이 줄을 서는 바람에 통신사들이 밤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조선통신사는 인삼 재배법과 동의보감을 기초로 한 의술 등 각종 전문 지식도 전했다.
○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들
이번에 취재진이 2주에 걸쳐 쓰시마 섬에서 도쿄까지 통신사들이 다닌 중요 지점들을 답사하면서 놀란 것은 이들이 남긴 흔적들이 매우 광범위하고 깊게 일본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쓰시마 섬은 아예 섬 전체가 통신사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고 교토 북동쪽의 비와(琵琶) 호수 연안에는 아직도 통신사가 다녔던 길이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통신사가 간 적이 없는 홋카이도 같은 곳에서까지 갓을 쓴 통신사 인형이 팔릴 정도였다.
지바 현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구루시마 히로시 관장은 “조선통신사의 의의는 매번 그 행렬이 일본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조선 사람을 직접 본 일본 대중이 그들에게 매우 호의를 가졌다는 데 있다”고 했다.
취재 기간 중 만난 일본 관계자들은 귀중한 그림과 글들의 원본을 아낌없이 공개하며 환대했다.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우리는 ‘조선통신사’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일 두 나라의 깊은 인연을 확인했다. 바로 그런 과정이야말로 400여 년 전 선조들이 지금의 후손들에게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시즈오카=허진석 / 구레=김정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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