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10-27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 <2>쓰시마 섬의 국서 위조 사건
말 두 마리가 마주 보는 형상이라 해서 우리가 대마도(對馬島)라고 부르는 쓰시마 섬은 배를 타고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이다. 부산항에서 쓰시마 섬 히타카쓰 항까지 딱 1시간 10분 걸린다. 이 섬은 현재 나가사키 현에 속해 있는 작은 섬이지만 17세기 이후 200년간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와 조선 왕조 간의 뜨거웠던 외교 현장이었다. 그 출발이 조선통신사였다.
○ 교류에 목을 맸던 쓰시마 섬
당시 쓰시마 섬은 세습 영주가 통치하던 번(藩)이었다. 번주(藩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에 사자(使者)를 보내 적극적인 강화 의지를 전한다. 전쟁 기간 조선과의 교역이 모두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섬으로서는 조선과의 교류가 생존의 문제였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이어 막부의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까지 화해 교섭을 지시한다. 번주는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가 죽은 지 석 달 만인 1598년 12월이었다.
조선은 초반에는 일본에서 온 사신들을 모두 죽여 버릴 정도로 단호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도요토미 군대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쓰시마 번주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쟁 중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을 데려오는 일이 급했다.
마침내 1604년 사명당 유정(1544∼1610)이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 섬에 간다. 사명당은 번주의 설득으로 교토(京都)까지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조선인 14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다.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한 조선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번주 차원이 아니라 도쿠가와가 직접 침략 전쟁을 사죄하고 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번주로서는 난처한 주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침략을 한 사람은 도요토미이지 내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국서를 보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사명당을 만났을 때에도 “나는 조선 출병에 관계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중간에서 쩔쩔매던 쓰시마 번주는 ‘엄청난 도박’을 결심하는데 다름 아닌 국서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 국서까지 위조한 쓰시마 번주
쓰시마 섬의 중심지는 이즈하라(嚴原)이다. 올 9월 11일 찾은 이곳 중심가 가와바타 거리 인근에는 한국과의 인연을 말해주는 상징물들로 가득했다. 조선통신사 기념비를 비롯해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1989)의 결혼봉축기념비, 독립운동가 최익현(1833∼1906)의 순국비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이다. 야마구치 가요(山口華代) 주임 학예사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기자를 자료관 안쪽 유리 액자에 보관된 문서 앞으로 안내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쓰시마 번주는 침략 전쟁에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아 도쿠가와의 옥새 서체 연호까지 위조해 조선에 전합니다. 너무 빠른 대응에 놀란 조선 왕조도 처음엔 의심하지만 결국 문제 삼지 않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그가 액자 속 문서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보는 이 문서는 (위조) 국서를 전달받은 선조가 1607년 사절단 편에 보낸 답장을 다시 위조한 것입니다. 쓰시마 번주는 선조의 답장을 도쿠가와가 받게 되면 자신들이 가짜 국서를 보냈다는 것이 들통 나 버릴 것이므로 답장 중 일부 문구를 바꾼 위조문서를 만들어 도쿠가와에게 전합니다.”
조작 내용은 대담했다. 원래 편지 내용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한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할 정도지만, 귀국(貴國)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쳤다고 하니 이렇게 후의에 답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귀국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쳤다고 하니 이렇게 후의에 답한다’는 부분은 지우고 ‘조선이 화교를 먼저 요청한다’고 고쳐 썼다.
편지 머리글에 있던 ‘봉복(奉福·답신)’이란 표현도 편지를 먼저 보내는 이가 쓰는 ‘봉서(奉書)’로 바꾸는 등 24자나 고쳤다.
○ 통신사 외교의 총연출자
국서 위조 사건은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나 들통이 나 버린다. 쓰시마 번을 배신한 중신이 고발한 것이었다. 당시 2대 번주는 에도(도쿄)로 불려가 선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추궁을 당하고 멸문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도쿠가와의 손자였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내부고발자인 중신을 유배시켜 버린다. 쓰시마 번이 중개하는 조선과의 교류도 그대로 이어져 통신사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야마구치 학예사는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번주가 처벌받지 않았던 것은 수교를 먼저 요청한 막부 입장에서 조선과의 수교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여정을 책임진 ‘총연출자’이자 ‘외교 창구’였던 번주를 처벌할 경우 정부가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떻든 당시 위조 사건은 결과적으로 한일 간에 평화가 이뤄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조선은 (위조) 국서 교환 후 선조 40년(1607년)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467명의 사절단을 보내는데 사실상 첫 통신사 파견이었다. 1차 사절단 명칭에 들어간 ‘쇄환(刷還)’은 포로를 데려오는 일을 맡았다는 의미이다. ‘서로 신의(信義)로써 교류한다’는 의미인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쓰인 것은 4차인 1636년부터였다.
○ 혼신의 노력을 다한 접대
통신사를 접대하는 쓰시마 섬의 노력은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다. 3년이나 사전 작업에 매달려 초청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행차 길을 정비하고 접대와 호위, 숙소 대책까지 모두 번주가 맡았다. 통신사가 도착하면 번주는 짐꾼과 호위 인력을 붙여 에도까지 안내했다. 당시 조선인 일행은 500명을 넘지 않았는데 이들까지 합치면 총 2000명이 넘는 행렬이 구성됐다고 한다.
이 같은 노력에 대한 보상은 컸다. 행차를 무사히 치러냄으로써 쇼군으로부터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컸던 보상은 조선과의 무역 독점권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쇄국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쓰시마 섬만 외국과의 거래를 통해 일본 곳곳에 물건을 팔아넘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조선통신사는 쓰시마 섬에 일종의 ‘종합무역상사’ 같은 특권과 막부의 인정을 안겨주는 ‘황금알’이었던 셈이다.
이즈하라 쓰시마 시청 옆 언덕배기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는 당시 통신사 접대를 도맡아 하던 본부 격이었다. 다나카 세코(田中節孝) 전 주지는 기자에게 “이곳은 임진왜란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탐지하러 왔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비롯해 사명당 스님이 3개월간 머무르는 등 400여 년 전 한국인 조상들의 숨결이 어린 곳”이라고 소개했다.
○ 지금도 이어지는 조선통신사의 명맥
쓰시마 섬과 조선통신사 간 특별한 인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즈하라는 조선통신사와 연고가 있는 일본 내 60여 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1980년) 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여기에는 쇼노 고자부로(庄野晃三朗)와 아들 쇼노 신주로(庄野伸十朗) 씨 노력이 컸다. 가업을 이어 화학회사를 운영하는 신주로 씨는 한국에서 온 기자를 환영하며 ‘아버지와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1980년 3월 자료관에서 상영했던 다큐멘터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부친은 그해 여름부터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사비를 털어 전력투구하는 부친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못마땅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부친이 1985년 작고할 때까지 말도 제대로 섞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품을 정리하다 조선통신사 자료와 기록들을 살펴보며 깜짝 놀라고 만다.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부친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전율이 일었습니다. 뒤늦게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거지요.”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를 매년 챙기고 있다. 신주로 씨는 “30, 40대를 주축으로 한 모임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쓰시마 섬과 조선통신사의 인연은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취재 마지막 날 저녁 기자는 가와바타 거리에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 오른 조선 선비들의 엄숙한 표정과 이들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는 일본 주민들의 표정이 대비되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 신주로 씨의 얼굴이 겹쳐졌다. 우리는 과연 신주로 씨만큼 우리의 조상들을 오늘에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시마=김정안 기자
2부 조선통신사의 길… <2>쓰시마 섬의 국서 위조 사건
쓰시마 섬에서는 조선통신사를 기리는 기념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섬의 가와바타 거리 중심가 벽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그려져 있고(위쪽 사진), 서산사에는 임진왜란 후 한일 관계 개선에 앞장선 외교승 겐소의 목상이 보존돼 있다(아래 왼쪽 사진).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이용됐던 서산사 정원에는 통신사 일원이던 김성일의 시비(아래 오른쪽 사진)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김정안 기자
○ 교류에 목을 맸던 쓰시마 섬
당시 쓰시마 섬은 세습 영주가 통치하던 번(藩)이었다. 번주(藩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에 사자(使者)를 보내 적극적인 강화 의지를 전한다. 전쟁 기간 조선과의 교역이 모두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섬으로서는 조선과의 교류가 생존의 문제였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이어 막부의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까지 화해 교섭을 지시한다. 번주는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가 죽은 지 석 달 만인 1598년 12월이었다.
조선은 초반에는 일본에서 온 사신들을 모두 죽여 버릴 정도로 단호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도요토미 군대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쓰시마 번주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쟁 중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을 데려오는 일이 급했다.
마침내 1604년 사명당 유정(1544∼1610)이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 섬에 간다. 사명당은 번주의 설득으로 교토(京都)까지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조선인 14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다.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한 조선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번주 차원이 아니라 도쿠가와가 직접 침략 전쟁을 사죄하고 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번주로서는 난처한 주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침략을 한 사람은 도요토미이지 내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국서를 보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는 사명당을 만났을 때에도 “나는 조선 출병에 관계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중간에서 쩔쩔매던 쓰시마 번주는 ‘엄청난 도박’을 결심하는데 다름 아닌 국서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 국서까지 위조한 쓰시마 번주
쓰시마 섬의 중심지는 이즈하라(嚴原)이다. 올 9월 11일 찾은 이곳 중심가 가와바타 거리 인근에는 한국과의 인연을 말해주는 상징물들로 가득했다. 조선통신사 기념비를 비롯해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1989)의 결혼봉축기념비, 독립운동가 최익현(1833∼1906)의 순국비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이다. 야마구치 가요(山口華代) 주임 학예사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기자를 자료관 안쪽 유리 액자에 보관된 문서 앞으로 안내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쓰시마 번주는 침략 전쟁에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아 도쿠가와의 옥새 서체 연호까지 위조해 조선에 전합니다. 너무 빠른 대응에 놀란 조선 왕조도 처음엔 의심하지만 결국 문제 삼지 않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그가 액자 속 문서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보는 이 문서는 (위조) 국서를 전달받은 선조가 1607년 사절단 편에 보낸 답장을 다시 위조한 것입니다. 쓰시마 번주는 선조의 답장을 도쿠가와가 받게 되면 자신들이 가짜 국서를 보냈다는 것이 들통 나 버릴 것이므로 답장 중 일부 문구를 바꾼 위조문서를 만들어 도쿠가와에게 전합니다.”
조작 내용은 대담했다. 원래 편지 내용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한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할 정도지만, 귀국(貴國)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쳤다고 하니 이렇게 후의에 답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귀국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쳤다고 하니 이렇게 후의에 답한다’는 부분은 지우고 ‘조선이 화교를 먼저 요청한다’고 고쳐 썼다.
편지 머리글에 있던 ‘봉복(奉福·답신)’이란 표현도 편지를 먼저 보내는 이가 쓰는 ‘봉서(奉書)’로 바꾸는 등 24자나 고쳤다.
○ 통신사 외교의 총연출자
국서 위조 사건은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나 들통이 나 버린다. 쓰시마 번을 배신한 중신이 고발한 것이었다. 당시 2대 번주는 에도(도쿄)로 불려가 선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추궁을 당하고 멸문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도쿠가와의 손자였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내부고발자인 중신을 유배시켜 버린다. 쓰시마 번이 중개하는 조선과의 교류도 그대로 이어져 통신사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야마구치 학예사는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번주가 처벌받지 않았던 것은 수교를 먼저 요청한 막부 입장에서 조선과의 수교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여정을 책임진 ‘총연출자’이자 ‘외교 창구’였던 번주를 처벌할 경우 정부가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떻든 당시 위조 사건은 결과적으로 한일 간에 평화가 이뤄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조선은 (위조) 국서 교환 후 선조 40년(1607년)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467명의 사절단을 보내는데 사실상 첫 통신사 파견이었다. 1차 사절단 명칭에 들어간 ‘쇄환(刷還)’은 포로를 데려오는 일을 맡았다는 의미이다. ‘서로 신의(信義)로써 교류한다’는 의미인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쓰인 것은 4차인 1636년부터였다.
○ 혼신의 노력을 다한 접대
통신사를 접대하는 쓰시마 섬의 노력은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다. 3년이나 사전 작업에 매달려 초청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행차 길을 정비하고 접대와 호위, 숙소 대책까지 모두 번주가 맡았다. 통신사가 도착하면 번주는 짐꾼과 호위 인력을 붙여 에도까지 안내했다. 당시 조선인 일행은 500명을 넘지 않았는데 이들까지 합치면 총 2000명이 넘는 행렬이 구성됐다고 한다.
이 같은 노력에 대한 보상은 컸다. 행차를 무사히 치러냄으로써 쇼군으로부터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컸던 보상은 조선과의 무역 독점권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쇄국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쓰시마 섬만 외국과의 거래를 통해 일본 곳곳에 물건을 팔아넘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조선통신사는 쓰시마 섬에 일종의 ‘종합무역상사’ 같은 특권과 막부의 인정을 안겨주는 ‘황금알’이었던 셈이다.
이즈하라 쓰시마 시청 옆 언덕배기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는 당시 통신사 접대를 도맡아 하던 본부 격이었다. 다나카 세코(田中節孝) 전 주지는 기자에게 “이곳은 임진왜란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탐지하러 왔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비롯해 사명당 스님이 3개월간 머무르는 등 400여 년 전 한국인 조상들의 숨결이 어린 곳”이라고 소개했다.
○ 지금도 이어지는 조선통신사의 명맥
쓰시마 섬과 조선통신사 간 특별한 인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즈하라는 조선통신사와 연고가 있는 일본 내 60여 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1980년) 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여기에는 쇼노 고자부로(庄野晃三朗)와 아들 쇼노 신주로(庄野伸十朗) 씨 노력이 컸다. 가업을 이어 화학회사를 운영하는 신주로 씨는 한국에서 온 기자를 환영하며 ‘아버지와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1980년 3월 자료관에서 상영했던 다큐멘터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부친은 그해 여름부터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사비를 털어 전력투구하는 부친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못마땅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부친이 1985년 작고할 때까지 말도 제대로 섞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품을 정리하다 조선통신사 자료와 기록들을 살펴보며 깜짝 놀라고 만다.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부친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전율이 일었습니다. 뒤늦게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거지요.”
취재 마지막 날 저녁 기자는 가와바타 거리에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 오른 조선 선비들의 엄숙한 표정과 이들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는 일본 주민들의 표정이 대비되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 신주로 씨의 얼굴이 겹쳐졌다. 우리는 과연 신주로 씨만큼 우리의 조상들을 오늘에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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