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10-22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33>심수관 가문
사쓰마는 일본 열도의 최남단 가고시마 현의 옛 이름이다. 이곳에서 만든 도자기를 ‘사쓰마야키’라 부르는데 세계적인 도자 브랜드이다. 원조는 조선 도공 심당길(沈當吉)이다. 후손 15대로 이어지는 심수관(沈壽官) 가문은 417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고 도자의 맥을 잇고 있다.
○ 단군신사 세운 조선 도공들
사쓰마에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사람들로 80명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끌고 간 사람은 시마즈 요시히로 사쓰마 번주(藩主)였다.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유재란에 참전한 시마즈는 1597년 8월 전북 남원성을 함락시키는데 이때 성 외곽에 살던 도공들을 붙잡아 끌고 갔다. 이들 속에 도공 심당길과 박평의가 있었다.
시마즈는 비디오게임에서 용맹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무장(武將)이다. 지난 회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선 도공들에게 조선말과 글을 쓰게 한 것은 물론이고 별도 정착지까지 마련해주면서 도자 생산에 박차를 가해 사쓰마를 최고 부자 번(藩)으로 만든다.
가고시마에서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곳은 히오키 시 미산(美山·미야마) 마을이다.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히가시이치키(東市來)라는 역에 내려 다시 차를 타고 5분 정도 들어가면 나온다. 4월 이 마을을 찾았다. 주민이 63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입구에 일본어 영어는 물론이고 ‘어서 오십시오’라는 한글 간판까지 세워져 있었다.
마을 자치위원회 격인 공민관을 이끄는 이시가와 미도리(石川みどり·68·여) 관장은 한국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으며 “우리 마을을 만든 이들은 조선 도공들이지만 지금은 그들의 후손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심수관 가마는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관장이 먼저 안내한 곳은 단군을 모신 옥산(玉山) 신사였다. 신사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도공들과 후손들은 이 언덕에 올라 조선 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어떻든 조선인들에게 단군을 모시는 신사까지 짓는 것을 허용한 것을 보면 시마즈 번주는 도공들이 조선의 혼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배려한 것 같다. 실제로 신사의 기와와 석등에는 시마즈 가문 문장(紋章)이 곳곳에 찍혀 있었다.
○ 15대 심수관
기자는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취해 15대 심수관(59)을 만날 수 있었다. 선 굵은 외모에서 한눈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는 14대 심수관(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활동 중)의 장남으로 1999년 1월 부친으로부터 습명(襲名·이름을 잇다)을 받았다. 명문대인 와세다대 교육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지만 가업(家業)을 잇기 위해 교토도공고등기술전문학교와 이탈리아 미술도예학교에서 공부했다. 경기 이천 옹기 공장에서 1년간 연수를 하기도 했다.
심수관 가문은 한국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1998년 1대 도공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 되는 해를 기념해 전북 남원에서 ‘심수관 400년 귀향제’가 열렸고 그해 동아일보 후원으로 14대 심수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400년 만의 귀향, 심수관 전’이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15대 심수관은 2013년 청송군 명예군민이 됐다. 그는 “15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14대가 젊었을 때는 전쟁 시기였다. 13대 때에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되면서 조선 이름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힘들었고 전쟁으로 도자기가 팔리지 않았다. 가문이 몰락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다. 그때 (도예) 기술을 많이 잃어버렸다. 14대가 그것을 살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직 100% 복원이 되지 못했다. 나는 기술 원료 등을 복원해 다시 예전처럼 화려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평생 도예를 한다는 것에 주저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과연 내 적성에 맞는지 불안하기도 했고,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해야만 한다는 소극적인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 1990년에는 경기 이천에 있는 옹기 공장에서 김칫독 만드는 것도 배웠다. 일본에는 없는 커다란 독을 만들어 보는 일도 매력적이었지만 내 뿌리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매우 서민적인 공장에서 생생하게 온몸으로 한국을 느끼는 경험이 됐다.”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아 본 것은 신혼여행 때. “25세였는데 조상들 마을인 청송을 찾아 청송 심씨 묘소에 참배도 하고 심씨 일족 친척들도 만났다. 부친이 신혼여행만큼은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따른 것이었다.”
그의 부친인 14대 심수관은 1998년 ‘심수관 400년 귀향제’가 남원에서 열렸을 때 ‘남원의 불(火)’을 가지고 가고시마로 간 적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말이다.
그는 지금도 1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상념에 잠긴다고 한다.
“초대 심당길은 당시 같이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격이었다고 한다. 80여 명을 가장(家長)처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번주와 싸우기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하나의 ‘무기’로 발전시켜서 인정받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사쓰마야키’를 빚을 수 있었고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신분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방도 시마즈 번주가 머물고 간 적이 있다. 이 방에 앉아 있으면 나의 운명, 우리 가문의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지만 한국과 일본의 오랜 인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장남도 교토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어 16대까지 가업이 이어지리라 보인다. 그의 말이다.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일일이 간섭은 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원료는 이것을 사용하라’ ‘이것은 사용하지 마라’ ‘기술은 중요하니까 제대로 배워 와라’ ‘도자기 구입하는 손님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15대 심수관은 “조선은 씨앗이었고 일본은 씨앗을 일군 터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심수관 작품은 조선 도예를 초석으로 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앞으로는 더욱 세계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400년 넘게 떨어져 있었어도 여전히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무려 417년 동안이나 심수관 가문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국적을 불문하고 기술과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해해 주면서 격려해 주었던 일본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심수관 가문이 일본의 자랑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분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 1부를 마칩니다. 2부는 조선통신사편으로 이어집니다.
미산 마을에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마을 인근 언덕에 단군을 모시는 신사를 짓고 망향의 아픔을 달랬다. 신사에 도착하기까지 기둥문인 도리이가 4개 서 있다.
14대 심수관
일본에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각각 독특한 기술과 디자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일본 도예의 세 가지 흐름을 말할 때 가라쓰, 아리타, 사쓰마(薩摩)를 꼽는데 이 중 사쓰마는 오늘날 일본 도자 문화의 도맥(陶脈)을 뚜렷이 드러내면서도 조선 도예의 기술과 전통을 잃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사쓰마는 일본 열도의 최남단 가고시마 현의 옛 이름이다. 이곳에서 만든 도자기를 ‘사쓰마야키’라 부르는데 세계적인 도자 브랜드이다. 원조는 조선 도공 심당길(沈當吉)이다. 후손 15대로 이어지는 심수관(沈壽官) 가문은 417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고 도자의 맥을 잇고 있다.
○ 단군신사 세운 조선 도공들
사쓰마에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사람들로 80명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끌고 간 사람은 시마즈 요시히로 사쓰마 번주(藩主)였다.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유재란에 참전한 시마즈는 1597년 8월 전북 남원성을 함락시키는데 이때 성 외곽에 살던 도공들을 붙잡아 끌고 갔다. 이들 속에 도공 심당길과 박평의가 있었다.
시마즈는 비디오게임에서 용맹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무장(武將)이다. 지난 회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선 도공들에게 조선말과 글을 쓰게 한 것은 물론이고 별도 정착지까지 마련해주면서 도자 생산에 박차를 가해 사쓰마를 최고 부자 번(藩)으로 만든다.
가고시마에서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곳은 히오키 시 미산(美山·미야마) 마을이다.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히가시이치키(東市來)라는 역에 내려 다시 차를 타고 5분 정도 들어가면 나온다. 4월 이 마을을 찾았다. 주민이 63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입구에 일본어 영어는 물론이고 ‘어서 오십시오’라는 한글 간판까지 세워져 있었다.
마을 자치위원회 격인 공민관을 이끄는 이시가와 미도리(石川みどり·68·여) 관장은 한국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으며 “우리 마을을 만든 이들은 조선 도공들이지만 지금은 그들의 후손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심수관 가마는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관장이 먼저 안내한 곳은 단군을 모신 옥산(玉山) 신사였다. 신사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도공들과 후손들은 이 언덕에 올라 조선 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어떻든 조선인들에게 단군을 모시는 신사까지 짓는 것을 허용한 것을 보면 시마즈 번주는 도공들이 조선의 혼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배려한 것 같다. 실제로 신사의 기와와 석등에는 시마즈 가문 문장(紋章)이 곳곳에 찍혀 있었다.
○ 15대 심수관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 명가 심수관 가마를 이끌고 있는 15대 심수관. 417년간 한 번도 끊기지 않은 가문의 도자 맥을 잇고 있는 그는 “한국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세계로 나간 도자기가 사쓰마야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히오키=장원재 특파원·히가시이치키 지소 제공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상점들로 이어진 마을 한가운데에 15대 심수관 가마가 있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이후 많은 조선 도공 후손이 일본 성(姓)으로 바꿨지만 심수관 가문은 ‘청송 심씨’를 버리지 않고 지켰다.
기자는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취해 15대 심수관(59)을 만날 수 있었다. 선 굵은 외모에서 한눈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는 14대 심수관(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활동 중)의 장남으로 1999년 1월 부친으로부터 습명(襲名·이름을 잇다)을 받았다. 명문대인 와세다대 교육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지만 가업(家業)을 잇기 위해 교토도공고등기술전문학교와 이탈리아 미술도예학교에서 공부했다. 경기 이천 옹기 공장에서 1년간 연수를 하기도 했다.
심수관 가문은 한국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1998년 1대 도공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 되는 해를 기념해 전북 남원에서 ‘심수관 400년 귀향제’가 열렸고 그해 동아일보 후원으로 14대 심수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400년 만의 귀향, 심수관 전’이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15대 심수관은 2013년 청송군 명예군민이 됐다. 그는 “15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14대가 젊었을 때는 전쟁 시기였다. 13대 때에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되면서 조선 이름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힘들었고 전쟁으로 도자기가 팔리지 않았다. 가문이 몰락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다. 그때 (도예) 기술을 많이 잃어버렸다. 14대가 그것을 살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직 100% 복원이 되지 못했다. 나는 기술 원료 등을 복원해 다시 예전처럼 화려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평생 도예를 한다는 것에 주저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과연 내 적성에 맞는지 불안하기도 했고,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해야만 한다는 소극적인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 1990년에는 경기 이천에 있는 옹기 공장에서 김칫독 만드는 것도 배웠다. 일본에는 없는 커다란 독을 만들어 보는 일도 매력적이었지만 내 뿌리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매우 서민적인 공장에서 생생하게 온몸으로 한국을 느끼는 경험이 됐다.”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아 본 것은 신혼여행 때. “25세였는데 조상들 마을인 청송을 찾아 청송 심씨 묘소에 참배도 하고 심씨 일족 친척들도 만났다. 부친이 신혼여행만큼은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따른 것이었다.”
그의 부친인 14대 심수관은 1998년 ‘심수관 400년 귀향제’가 남원에서 열렸을 때 ‘남원의 불(火)’을 가지고 가고시마로 간 적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말이다.
심수관家 대표작 1代가 빚은 ‘히바카리’ 조선 도공 출신인 초대 심당길의 작품 히바카리는 조선의 흙과 유약, 기술로 만들었고 불만 일본의 것을 빌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아일보DB
“초대 심당길 일행이 일본에 끌려올 때 가지고 온 것은 흙과 유약 기술이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불(火)만 일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히바카리(火計り·오로지 불뿐이라는 의미)’라고 부른다. 하지만 4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꾸로 일본의 흙과 유약과 일본 기술에 한국의 불로 도자기를 구워보자고 해서 한국의 불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1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상념에 잠긴다고 한다.
“초대 심당길은 당시 같이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격이었다고 한다. 80여 명을 가장(家長)처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번주와 싸우기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하나의 ‘무기’로 발전시켜서 인정받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사쓰마야키’를 빚을 수 있었고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신분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방도 시마즈 번주가 머물고 간 적이 있다. 이 방에 앉아 있으면 나의 운명, 우리 가문의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지만 한국과 일본의 오랜 인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장남도 교토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어 16대까지 가업이 이어지리라 보인다. 그의 말이다.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일일이 간섭은 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원료는 이것을 사용하라’ ‘이것은 사용하지 마라’ ‘기술은 중요하니까 제대로 배워 와라’ ‘도자기 구입하는 손님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15대 심수관은 “조선은 씨앗이었고 일본은 씨앗을 일군 터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심수관 작품은 조선 도예를 초석으로 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앞으로는 더욱 세계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400년 넘게 떨어져 있었어도 여전히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무려 417년 동안이나 심수관 가문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국적을 불문하고 기술과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해해 주면서 격려해 주었던 일본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심수관 가문이 일본의 자랑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분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심수관 가문의 역사는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제 암울한 기억들은 뒤로하고 한일 모두 미래와 세계를 향해 평화와 우애의 메시지를 세계를 향해 발신해야 할 때가 아닐까.
히오키=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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