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1.09
지난 시월 마지막 날, 고창 질마재를 다녀왔다.
‘미당문학제’ 취재가 목적이었다.
서울에서 고창으로 가는 길,
내내 우하(又下) 서정태 선생을 떠올렸다.
질마재의 국화가 제대로 피었는지, 하늘이 푸른 지 안중에 없었다.
단풍철 교통체증을 감안해 서둘러 출발 했건만, 당도하니 고작 이십여 분의 여유가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왁자지껄 했다.
올 미당문학상 수상자인 최정례 시인과 일행들이 우하 선생과 한창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천인 국화, 푸르디 푸른 하늘보다 아흔세 살 시인의 훤한 미소, 그걸 보고서야 맘이 놓였다.
처음 우하 선생을 만난 건 2012년 봄이었다.
동백꽃 흐드러진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 동백꽃축제’ 중 ‘시인과의 대화’를 취재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일행 중에 술을 지독히 좋아하는 시인이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술이었다.
점심, 저녁은 물론 아침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사실 술은 고역이었다.
술을 잘 못하는 편이다.
술을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안 먹으며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마침 술자리에 함께했던 어떤 이가 우하 선생의 이야기를 했다.
“미당 선생의 친동생이 삼 년 전부터 예서 삽니다. 연세가 아흔쯤 됩니다.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내고 있죠.”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기자로서 취재할 만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술자리를 파할 더 할 나위 없는 구실이었다.
얼른 가서 만나자고 성화를 부렸다.
모두 여섯의 일행 중 다섯은 흔쾌히 동의했다.
애주가 시인도 설핏 뜸들이다 동참했다.
미당 선생의 생가 오른편에 자리 잡은 소담한 초가였다.
처마 밑엔 우하정( 又下亭)’이란 현판이 있었다.
기척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아줬다.
다들 방에 들어오라 했다.
두어 평 남짓이나 될까싶은 방, 가운데엔 앉은뱅이책상, 방문 옆에 싱크대와 찬장,
한쪽 벽은 책장, 그게 다였다.
여섯의 일행이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을 정도였다.
취재기자가 아흔의 노인이 어찌 홀로 지내는 지 물었다.
“요 앞 질마재에 부모님과 형님 내외의 산소가 있어. 문만 열면 보이지. 예서 시묘 살이 하는 셈이야.”
그러면서 웃었다.
아흔 해 삶을 살아 온 노인의 장난기 머금은 웃음, 얄궂었다.
그러고서는 창호지의 그림을 보라고 했다.
마을 약도였다.
뉘 집에 누가 사는지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들 내 일처럼 도와준다고 했다.
싱크대 위의 고사리와 취나물을 가리켰다.
딱 한 줌씩이었다.
마을의 어떤 이가 주고 갔다고 했다.
많이 안 먹으니 그 정도도 족하다고 했다.
자식이 같이 살자고 해도 단지 여기가 좋아서 사는 거라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로또 복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매주 오천 원 어치 복권을 대신 사다주는 이가 있다고 했다.
정작 당신은 복권 파는 곳을 모른다며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아흔 노인이 뭐가 아쉬워 매주 복권을 사는 지 궁금했다.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하 선생이 먼저 질문을 했다.
“여기 돈 필요한 사람 있는가? 돈 필요하면 내가 나중에 다 줄게.”
앞집에 누구는 뭘 했는데 잘못되어 얼마가 필요하고,
그 윗집의 누구는 여차해서 얼마가 필요하다고 하니 복권만 맞으면 그 사람들 나눠줄 거라고 했다.
매주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오천원으로 일주일 내내 나눠주는 행복한 꿈을 꾸는 일, 매주 복권을 사는 이유였다.
우하정의 의미를 물었다.
“여기 미당 생가가 나의 생가이기도 해. 그 아래 있으니 우하요. 그리고 미당의 아우이니 또 우하지.”
좌중을 돌아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모든 것의 아래, 또 아래라는 의미야.”
결국 모든 것의 아래에 당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미당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심 걱정했지만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형님에게 물어 봤어. 조선이 일본에 영원히 먹히는 거냐고 물었지. 형님은 ‘한민족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는 먼 훗날 비로소 또렷해지는 거다‘고 했어.
사실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녀.”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말, 아우로서 형을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시를 여러 편 읽어줬다.
정확히 말하면 암송이었다.
아흔의 시인이 보지 않고 암송을 하는 일, 쉽지 않을 터다.
그만큼 당신의 시가 가슴에 맺히고 맺혔다는 게다.
“내가 시를 쓴 건 전적으로 미당의 영향이야. 그런데 미당의 아우라는 게 벽이었어.”
‘미당 아우 서정태’라는 사실이 ‘시인 서정태’로서는 벽이었음을 고백한 게다.
짠했다.
1986년 첫 시집을 낸 이후 여태 두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한 이유였다.
술자리에서 우하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가 마침 출판사의 대표였다.
시에 사진을 맞추어 줄 테니 시집을 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 출판 여건에서 시집을 내는 일, 웬만해서는 이해타산을 맞추기 어렵다.
십중팔구 적자를 면키 어려운 게 시집 출간이다.
그런데도 그 대표는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 다음해, 우하 선생의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가 세상에 나왔다.
우하 선생이 그때 말했다.
“미당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고,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미당이야.
권 기자, 열심히 쓸 테니 내 나이 아흔셋에 한 번 더 시집을 내자구.”
금년, 우하 선생 아흔셋이다.
만나자마자 물었다.
“시는 잘 되십니까?”
“요즘은 도통 시가 안 돼. 억지로 나오는 게 아녀. 시는…….”
앞마당 평상에 수박만한 하얀 돌이 올려 져 있었다.
돌의 용도를 물었다.
“산돌이야. ‘국화와 산돌’이란 형님의 시가 있잖아. 국화만 있고 산돌은 없길래 누구 시켜서 하나 구해달라고 했어. 생가에 심어 놓을려구.”
그 말끝에 아흔셋의 시인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난 울컥했다.
‘우하정에서 사는 우하’ 그대로였다.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지난 시월 마지막 날, 고창 질마재를 다녀왔다.
‘미당문학제’ 취재가 목적이었다.
서울에서 고창으로 가는 길,
내내 우하(又下) 서정태 선생을 떠올렸다.
질마재의 국화가 제대로 피었는지, 하늘이 푸른 지 안중에 없었다.
단풍철 교통체증을 감안해 서둘러 출발 했건만, 당도하니 고작 이십여 분의 여유가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왁자지껄 했다.
올 미당문학상 수상자인 최정례 시인과 일행들이 우하 선생과 한창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천인 국화, 푸르디 푸른 하늘보다 아흔세 살 시인의 훤한 미소, 그걸 보고서야 맘이 놓였다.
처음 우하 선생을 만난 건 2012년 봄이었다.
동백꽃 흐드러진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 동백꽃축제’ 중 ‘시인과의 대화’를 취재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일행 중에 술을 지독히 좋아하는 시인이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술이었다.
점심, 저녁은 물론 아침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사실 술은 고역이었다.
술을 잘 못하는 편이다.
술을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안 먹으며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마침 술자리에 함께했던 어떤 이가 우하 선생의 이야기를 했다.
“미당 선생의 친동생이 삼 년 전부터 예서 삽니다. 연세가 아흔쯤 됩니다.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내고 있죠.”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기자로서 취재할 만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술자리를 파할 더 할 나위 없는 구실이었다.
얼른 가서 만나자고 성화를 부렸다.
모두 여섯의 일행 중 다섯은 흔쾌히 동의했다.
애주가 시인도 설핏 뜸들이다 동참했다.
미당 선생의 생가 오른편에 자리 잡은 소담한 초가였다.
처마 밑엔 우하정( 又下亭)’이란 현판이 있었다.
기척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아줬다.
다들 방에 들어오라 했다.
두어 평 남짓이나 될까싶은 방, 가운데엔 앉은뱅이책상, 방문 옆에 싱크대와 찬장,
한쪽 벽은 책장, 그게 다였다.
여섯의 일행이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을 정도였다.
취재기자가 아흔의 노인이 어찌 홀로 지내는 지 물었다.
“요 앞 질마재에 부모님과 형님 내외의 산소가 있어. 문만 열면 보이지. 예서 시묘 살이 하는 셈이야.”
그러면서 웃었다.
아흔 해 삶을 살아 온 노인의 장난기 머금은 웃음, 얄궂었다.
그러고서는 창호지의 그림을 보라고 했다.
마을 약도였다.
뉘 집에 누가 사는지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들 내 일처럼 도와준다고 했다.
싱크대 위의 고사리와 취나물을 가리켰다.
딱 한 줌씩이었다.
마을의 어떤 이가 주고 갔다고 했다.
많이 안 먹으니 그 정도도 족하다고 했다.
자식이 같이 살자고 해도 단지 여기가 좋아서 사는 거라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로또 복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매주 오천 원 어치 복권을 대신 사다주는 이가 있다고 했다.
정작 당신은 복권 파는 곳을 모른다며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아흔 노인이 뭐가 아쉬워 매주 복권을 사는 지 궁금했다.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하 선생이 먼저 질문을 했다.
“여기 돈 필요한 사람 있는가? 돈 필요하면 내가 나중에 다 줄게.”
앞집에 누구는 뭘 했는데 잘못되어 얼마가 필요하고,
그 윗집의 누구는 여차해서 얼마가 필요하다고 하니 복권만 맞으면 그 사람들 나눠줄 거라고 했다.
매주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오천원으로 일주일 내내 나눠주는 행복한 꿈을 꾸는 일, 매주 복권을 사는 이유였다.
우하정의 의미를 물었다.
“여기 미당 생가가 나의 생가이기도 해. 그 아래 있으니 우하요. 그리고 미당의 아우이니 또 우하지.”
좌중을 돌아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모든 것의 아래, 또 아래라는 의미야.”
결국 모든 것의 아래에 당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미당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심 걱정했지만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형님에게 물어 봤어. 조선이 일본에 영원히 먹히는 거냐고 물었지. 형님은 ‘한민족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는 먼 훗날 비로소 또렷해지는 거다‘고 했어.
사실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녀.”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말, 아우로서 형을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시를 여러 편 읽어줬다.
정확히 말하면 암송이었다.
아흔의 시인이 보지 않고 암송을 하는 일, 쉽지 않을 터다.
그만큼 당신의 시가 가슴에 맺히고 맺혔다는 게다.
“내가 시를 쓴 건 전적으로 미당의 영향이야. 그런데 미당의 아우라는 게 벽이었어.”
‘미당 아우 서정태’라는 사실이 ‘시인 서정태’로서는 벽이었음을 고백한 게다.
짠했다.
1986년 첫 시집을 낸 이후 여태 두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한 이유였다.
술자리에서 우하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가 마침 출판사의 대표였다.
시에 사진을 맞추어 줄 테니 시집을 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 출판 여건에서 시집을 내는 일, 웬만해서는 이해타산을 맞추기 어렵다.
십중팔구 적자를 면키 어려운 게 시집 출간이다.
그런데도 그 대표는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 다음해, 우하 선생의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가 세상에 나왔다.
우하 선생이 그때 말했다.
“미당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고,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미당이야.
권 기자, 열심히 쓸 테니 내 나이 아흔셋에 한 번 더 시집을 내자구.”
금년, 우하 선생 아흔셋이다.
만나자마자 물었다.
“시는 잘 되십니까?”
“요즘은 도통 시가 안 돼. 억지로 나오는 게 아녀. 시는…….”
앞마당 평상에 수박만한 하얀 돌이 올려 져 있었다.
돌의 용도를 물었다.
“산돌이야. ‘국화와 산돌’이란 형님의 시가 있잖아. 국화만 있고 산돌은 없길래 누구 시켜서 하나 구해달라고 했어. 생가에 심어 놓을려구.”
그 말끝에 아흔셋의 시인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난 울컥했다.
‘우하정에서 사는 우하’ 그대로였다.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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