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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구호 정치로는 국가 운영 못해 노무현, 대통령 되면 알 거라 생각했다” … 노 대통령, 3당 대표 불러 삼겹살 파티 “실탄 겨누기만 하고 쏘지 마

바람아님 2015. 11. 18. 04:58

[중앙일보] 입력 2015.11.1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6> JP와 노무현
3김 정치 싸잡아 비판한 노무현
JP “그의 파격과 열정, 화법에 주목
이념 극단성보다 국정 운영 걱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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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17일 충북 청주시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JP) 자민련 총재가 골프장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JP가 이날 “ 구정치인에게도 기술은 있다”고 농담하자 노 대통령은 “오늘 한 수 배우겠다”고 호응했다. 만찬까지 이어진 청남대 회동엔 여야 대표가 초청됐으며 JP는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희태 당 대표권한대행 사이에 조정·중재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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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가치는 요지부동의 국가관과 위기관리의 결단력이라고 본다.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중엔 인간미도 있다. 인간미는 정치인의 매력적인 품성이다. 2002년 대선 무대에 전격 등장해 대통령이 된 노무현씨의 성정엔 사람을 끌어당기는 요소가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주목한 건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씨의 국회 청문회 증언 때였다. 그때 나는 신민주공화당 총재로서 노태우 대통령, 김대중(DJ)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와 이른바 1노3김 회담을 통해 5공 청산을 매듭짓기로 합의했다. 그 마지막 절차가 전씨를 증언대에 세우는 것이었는데 “광주사태의 발포는 현지 지휘관의 자위권 행사”라는 전씨의 책임회피성 답변에 노무현 초선 의원이 흥분해 명패를 내던지는 돌출 장면을 보고 ‘아, 노무현이란 사람이 참 다혈질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노무현의 그 뒤 정치행로는 YS의 3당합당과 DJ의 정계복귀를 반대했고, 나를 싸잡아 3김정치·지역주의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 해서 내가 그를 불편하게 느꼈다거나 전적인 거부감을 가졌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파격과 열정, 대중을 끄는 화법(話法)을 나는 흥미롭게 지켜봤다. 2002년 대선 때 나는 이회창과 노무현 후보 사이에 중립을 지켰는데 결과적으로 노 후보를 음(陰)으로 도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민이 노무현을 선택하면 그건 그것대로 국운(國運)이라는 심정이었다. 오랫동안 정형화된 지도자상, 관행화된 정치질서를 봐왔던 국민들이 ‘아, 이제 이런 사람도 대통령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을 했다. ‘기성(旣成)을 거부하는 좌파 성향 사람들이 집권을 해서 정치를 하면 어떻게 하나 보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의 반미(反美)나 이념적 극단성을 염려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위험하다고 지적받을 정도로 자신의 사상체계를 갖추지 않았고 이념을 정교하게 연마한 인물이 아니었다. 막상 대통령이 되면 재야나 야당 시절의 구호 정치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나는 오히려 이회창 후보를 겨우 이긴 노 대통령이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지닌 거야(巨野) 한나라당의 선거불복 심리에 발목을 잡혀 국정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나라의 안정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점을 염려했다. 좌파정부라고 몰아붙이고 흔들어대기보다 나 자신 보수세력의 한 축으로서 신생 정부의 안착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보혁(保革)구도라면 색깔이 다른 양 진영이 막무가내 싸우는 것만 상상할지 모른다. 그건 상상력의 빈곤이다. 양 진영이 노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국익을 위해 서로 돕는 보혁 공존의 정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의 분노와 충격으로 싸우겠다는 전의(戰意)를 표출하고 있었다. 소수정당이지만 자민련은 그런 자세에서 벗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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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내외신 연두 기자회견에서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중앙포토]


 노 대통령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자기 세력(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자 달라졌지만 그 전까지는 3당(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대표들을 자주 불렀다. 자신의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국정 현안을 정치적으로 타결하려고 노력했다. 2003년 한 해 동안 그는 나를 네 번이나 초청했다. 4월 17일 충북 청원군의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靑南臺)로 당 대표들이 모였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있었던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법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먼저 노 대통령과 나, 정대철 민주당 대표 등이 9홀짜리 골프장에 나섰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권한대행은 골프 참석을 거절해 그 당 출신인 이원종 충북지사가 대신 나왔다.

 운동이 끝난 후 준비된 만찬엔 삼겹살에 소주가 나왔다. 골프 뒤에 합류한 박희태 대표대행이 “오늘 싸움하러 왔다”고 달려들자 노 대통령은 “실탄을 많이 준비하신 것 같은데 겨누기만 하고 쏘지는 마시라”고 넌지시 받아넘겼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묻어났다. 괜찮은 분위기였다. 대통령이 자신을 내려놓으며 정성을 쏟자 각 당 리더들이 속셈을 털어놨다.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접점이 찾아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YS·DJ는 정치현장을 떠났고 소위 3김 중에선 나 혼자 현역으로 남아 10~20년 후배 정치인들과 국사를 논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희태 대행은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나를 쳐다보면서 자기들 주장의 시비를 가려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북송금특검법 개정협상은 그날 타결됐다. 청남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면서 나는 노 대통령에게 순진한 맛이 있음을 느꼈다. 뭐랄까, 정상에 선 사람의 독특한 면모를 보았다고 할까. 남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마음 씀씀이가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게 드러나면 금세 “잘못했다”며 사과하고 웃어 넘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5년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국민통합이라는 국정목표에 비추어 보면 많은 갈등과 논쟁을 일으켰다. 나라를 굳건하게 세우고 민심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미가 있었으나 국가관에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다. 일례로 김대중 대통령 말년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비용으로 국회가 책정한 예산 200억원을 노무현 정부는 집행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댔지만 결국 노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비롯된 일이었다. 입법부가 통과시킨 예산을 대통령이 자의(恣意)로 중단하는 것은 헌법에 따른 국정운영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를 외면한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한민국을 “반칙과 특권과 기득권이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말했는데 이건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한국은 스스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싸우고 땀과 피를 흘리며 나라의 울타리를 튼튼히 키워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써왔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생성하고 변화, 발전해왔으며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국가관인데 노 대통령은 이 인식에서 심각하고 어처구니없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는 역사와 국가관에 있어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을 정밀하게 알았다. DJ가 아슬아슬하게 선 근처에 접근해도 그걸 넘는 일이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노 대통령의 관념 속엔 선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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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19일 노무현 전 의원(맨 오른쪽)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대선 광고 방송 제작에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맨 왼쪽), 박태준(오른쪽에서 둘째) 총재와 함께 출연한 뒤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노 대통령 본인으로선 내면의 솔직함과 국정 운영의 중압감을 표출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받겠다” 등의 말은 나라를 충격 속에 몰아넣고 국민을 혼란에 빠트렸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태였다. 2003년 5월 노 대통령은 5·18 관련 인사들에게 “요 근래 제가 부닥치는 문제(이라크 파병반대, 화물연대 파업, 공무원노조 파업)들이 너무 어렵다. 모두가 힘으로 밀어붙이려고만 하니….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대통령도 한 자연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고뇌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가의 표상이고 국민의 중심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의심과 두려움 속에 흔들릴 때에도 대통령만은 의연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줘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직업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의 성격에 대해 좀 더 투철한 인식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2003년 12월 14일 청와대에 노 대통령 초청으로 나와 김원기 열린우리당 의장,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갔을 때도 야당 대표들은 대통령다운 신중하고 믿음직한 언행을 주문했다. 이때 나는 노 대통령에게 ‘국민투표 재신임 주장’을 철회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책임정치를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과 한나라당·민주당은 그해 봄 청남대 회동 때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부딪쳤다. 나는 야당이고 소수파였지만 선배 정치인으로서 정치 파국을 막기 위한 중재와 조정에 주력했다. 다른 야당 대표들에게 “대통령과 당 대표가 모이는 자리에서 결론이 없으면 안 된다. 현안에 당론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예의와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충고했다. 회동 뒤 정치경색이 심화되고 탄핵정국으로 치달으면서 온 나라가 걷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진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 대통령의 죽음은 불가사의다. 고향마을 뒷산 바위에서 그를 투신케 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뭔지는 몰라도 대통령을 지내면서 쌓이기 시작한 고민의 두께가 그렇게 컸을 것이다. 제3자는 알 수 없는 번민과 회한, 분노와 고뇌가 얽히고 쌓여 그걸 참지 못하고 결국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왜 자살을 했을까. 나는 아직도 거기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노 대통령 주변에 그 의문을 풀려고 애쓴 사람이 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정작 궁금증을 풀어야 할 사람들은 그 일을 제쳐놓고 잊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소사전 대북송금특검법=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직전 현대 측이 북한에 비밀 송금한 4억5000만 달러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검사를 임명토록 한 법. 2003년 3월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통과시킨 법안을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공포됐다. 그 뒤 법안 개정을 위한 추가협상이 여야 간 진행됐으나 최종 타결에 실패했다. 2003년 6월 특검은 1억 달러는 정상회담과 관련한 김대중 정부의 정책적 차원의 지원금, 3억5000만 달러는 현대의 대북사업 투자금이라고 성격 규정했다. 비밀·불법 송금을 주도한 혐의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구속), 임동원 전 국정원장(불구속) 등이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