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다양한 송구영신(送舊迎新) 풍습이 있었다. 조선 후기 문인 유만공은 ‘세시풍요’에서 “한 해를 마치는 것을 세속에서는 ‘세흘(歲訖)’이라고 일컫는다”며 “새해 맞아 복이 더해지기를 기원하면서/ 친구들 서로 축원하며 서신을 보내네”라고 노래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제일(除日)이라 했다. 제(除)는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내는 것을 뜻한다. 민가에서는 이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했다. 가는 해를 먼지 털듯이 털어내고 묵은 것을 다 쓸어버려야 액(厄)이 모두 물러나 새해에 복이 깃든다고 믿었다. 빚이 있는 사람들은 해를 넘기지 않고 모두 갚았다.
박완규 논설위원 |
제야에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고 온 가족이 모여 밤을 새우는 풍속을 ‘수세(守歲)’라 했다. 중국 북송 시대 시인 소식의 시 ‘수세’는 이렇게 시작한다. “다해 가는 한 해를 알고 싶은가/ 마치 골짜기로 달려가는 뱀과 같도다/ 긴 비늘 반이 이미 들어가 없으니/ 가는 뜻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우리 선비들이 자주 인용한 구절이다. 조선 중기 문인 이정귀는 ‘월사집’에 남긴 시에서 “옛사람이 수세를 중히 여긴 것은/ 한 해를 머물러 두기 어려워서였지”라고 했다. 수세의 의미를 잘 표현한 시구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는 “집집마다 다락, 마루, 방, 부엌에 모두 기름등잔을 켜놓는다. 등잔은 흰 사기접시에 실을 여러 겹 꼬아 만든 심지를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을 외양간과 변소에까지 켜서 대낮처럼 환하게 해놓고 밤새도록 자지 않는다”고 했다. 불을 켜두면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액을 막아주며 집안에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밤을 새우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반성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통과의례다. 마지막 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잠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 탓에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국문학자 양주동은 수필 ‘제야잡기’에서 “밤새껏 안팎에 등불을 켜놓고 잠 안 자는 것이 끝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며 “생각하면 꿈같은 추억이요, 아름다운 전설의 세계다”라고 회고했다.
지금은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33번 친다. 불교 수호신인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나라와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 외에는 별다른 행사 없이 무덤덤하게 보낸다. 그러니 반성도 계획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은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라며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같은 날 새겨들을 말이다.
교수신문의 올해 사자성어가 ‘혼용무도(昏庸無道)’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올해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신조어 ‘금수저’도 가슴 아픈 말이다. 잘못된 일을 개인 탓으로 여기기에 더 고단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누구나 살기 어려운 한 해였다. 새해는 달라지길 바란다. 나라와 국민 모두 거듭나려는 노력으로 대운을 여는 해가 되길 기원한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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