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태평로] 新種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고?

바람아님 2016. 1. 8. 10:29

(출처-조선일보 2016.01.08 김기철 문화부장)


김기철 문화부장작가 박완서의 단편 '마른 꽃'을 읽다가 가슴이 서늘해졌다.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과 결혼하려는 딸을 만류하는 어머니 얘기였다. 
'개천에서 난 용한테 시집가는 건 용한테 가는 게 아니라 개천에 빠지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울고 불며 말려도 나한테는 개천이 보이지 않고, 용만 보였다. 
어머니의 예언은 적중했고, 나의 개천과의 악전고투는 막내 시누이를 시집보낼 때까지 계속됐다.'

세상살이 이치를 똑 부러지게 짚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헤집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독자를 위로하듯 작가는 곧이어 '남들에게는 개천으로 보이는 것이 나한테는 
사는 보람이요, 씩씩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며 한 남자만 보게 한 맹목(盲目)의 힘을 찬미했다. 
박완서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기면서도 따뜻한 시선 한 줌을 잃지 않는 대가(大家)였다.

'개룡남'을 다시 떠올린 건 지난해 유행한 '흙수저' 때문이다. 
부자이거나 잘나가는 부모 덕에 풍족하게 자란 사람을 금수저, 그렇지 못한 사람을 흙수저라고 한다는데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할 만큼 청년 세대의 삶이 팍팍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금수저'를 문 덕분에 부모 '빽'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손쉽게 취직하는 걸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있으니 이런 유행어가 급속하게 번졌을 것이다.

하지만 '흙수저'라는 용어 뒤엔 부모를 쓸모없는 흙덩이 취급하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개룡남' 역시 역경 속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것 같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자식의 성공을 뒷받침한 부모들까지 
구정물이 흐르는 개천에 빗대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이 나라에 희망은 없으니 빨리 뜨자'며 선동하는 '헬조선'에 이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까지 등장하는 건 
지나친 자기 비하(卑下)나 부정(否定)이다.

열병 앓듯 번지는 자기 비하와 현실 부정을 젊은 층의 푸념 정도로 넘기고 싶은데, 일부 지식인까지 가세하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은 최근호 머리말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계기 삼아 현재의 정국을 '신종(新種) 쿠데타 국면으로, 
6월 항쟁의 승리를 경험한 국민을 속이고 달래고 을러대면서 수구 세력의 영구 집권 체제를 복원하려는 
21세기 한국의 맞춤형 변종 쿠데타라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데, 창비의 정신적 지주인 백낙청 명예편집인까지 '신종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면'이라는 
제목의 신년 칼럼으로 거들고 나섰다. '수구 세력의 장기 집권이 쿠데타의 목표인 만큼 2017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꺾으면 최소한 이번 신종은 치명상을 입는 것이다'는 게 '창비 백 선생'의 제언이다.

2016년 대한민국을 5·16이나 12·12 같은 쿠데타 정국에 빗대는 관념의 과격화가 현실의 난제를 헤쳐나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수구 세력의  장기 집권이 쿠데타의 목표'라는 진단은 정권 타도에 나서자는 선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왜곡하는 과격한 언설(言說)과 '흙수저' '헬조선' '이생망' 같은 지나친 자기 비하는 우리 사회 내부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의 발목만 붙잡을 뿐이다. 
말과 이름이 제자리 찾기를 갈구했던 공자(孔子)의 '정명'(正名)'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