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빨리빨리' 중독

바람아님 2016. 1. 10. 08:19

(출처-조선일보 2016.01.05 팀 알퍼 칼럼니스트  김도원 화백)


팀 알퍼 칼럼니스트한국에 온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빨리빨리'라는 건 오래된 농담이다. 
사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한국 어디에서 누굴 만나든 "빨리 주세요" "빨리 와" "빨리해" 같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누군가를 '조금 느린 스타일'이라고 평한다면 그건 대체로 그이를 욕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 '빨리빨리' 문화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예전엔 내 동료가 일을 맡기면서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하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요즘엔 나도 그 "최대한 빨리"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대에게 "천천히 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싫어진다.

한국에 정착하기 전 스페인에서 1년 정도 산 적이 있다. 한국과는 반대로 아주 느긋한 국민성으로 유명한 나라다. 
그 나라에선 '빨리빨리'라는 말 대신 'manana(내일)'라는 말을 자주 쓴다. 
보통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다음 주'나 '다음 달'이라는 의미로 쓴다. 
가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내일' 문화도 중독성이 있었다. 
스페인에 살 때 보통 지각을 했고, 해변에 나가 노느라 일을 팽개친 적도 많았다. 
스트레스란 단어 자체를 잊고 살았다. 대신 거기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 기억도 없다.
[일사일언] '빨리빨리' 중독
한국에선 항상 '빨리빨리'라는 말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 결과 내가 해낸 일의 성과에 놀라게 된다. 
이젠 사람들이 "혹시 언제쯤 끝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묻기도 전에 폭풍 같은 속도로 일을 마치는 법도 배웠다.

부작용도 있다. 스페인에서 살 때와 달리 난 너무나 조급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빨리빨리' 문화와는 거리가 먼 나의 모국 영국에 가도 변함없다. 
가게에 가면 계산대 점원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그 점원에게 "좀 빨리하면 안 돼요?"라고 소리지르고 싶어진다. 
한국이 날 망친 걸까. 그래도 난 남은 생을 이 나라에서 살 것이니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