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6일 북한 핵 실험과 개성공단 전면 중단과 관련, “이제 더 이상 북한의 기만과 위협에 끌려 다닐 수는 없으며, 과거처럼 북한의 도발에 굴복하여 퍼주기식 지원을 하는 일도 더 이상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에서 “기존의 방식과 선의로는 북한 정권의 핵개발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고,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화시켜서 결국 한반도에 파국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근본적 해답을 찾아야 하며, 이를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30분 동안 연설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앞으로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취해 나갈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며 “지금부터 정부는 북한 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조치들을 취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가 지급한 달러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쓰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 지도부에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지원하게 되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지속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민들의 단합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각종 도발로 혼란과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선전·선동을 강화할 수도 있다”며 “그럴수록 우리 국민들의 단합과 국회의 단일된 힘이 북한의 의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이라는 원인보다는 ‘북풍의혹’같은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이라며 “우리가 내부에서 그런 것에 흔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지금 우리 모두가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 규탄하고 북한의 무모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도 모자라는 판에 우리 내부로 칼끝을 돌리고, 내부를 분열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와 관련, “지금 정부는 확고한 군 대비태세 확립과 함께 사이버 공격, 다중시설 테러 등의 비군사적 도발에도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며 “강력한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 연합방위력을 증강시키고, 한·미동맹의 미사일 방어태세 향상을 위한 협의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10일 발표한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 협의 개시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에서 함부로 내질렀다 낭패를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 마구 화를 쏟아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기도 하고, 부당한 지시를 한 상사에게 대들다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게 사람이다. 분노는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불의에 분노하기도 하고, 실망감과 배신감에 분노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다. 남북한을 잇는 마지막 연결고리인 개성공단마저 닫아 버렸으니 말이다. 조선일보 13일자 보도에서 박 대통령의 분노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지난 10일 발표한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성명’에서 통일부가 올렸던 원안(原案)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직접 손을 보면서 빨간 줄을 휙휙 긋고 새로 고쳐 썼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성명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육성(肉聲)이나 다름 없다”며 “신뢰를 저버린 상대에 대한 분노가 담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국 배치 협상 개시 결단을 내린 걸 보면 중국에 대해서도 몹시 화가 난 게 틀림없다. 유일하게 북한을 다룰 수 있는 지렛대를 가진 중국이 ‘끝장 대북 제재’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동안 박 대통령이 중국에 들인 공을 생각하면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낄 만하다.
북한은 신년벽두 수소탄 실험을 한다며 핵 지진파를 만들어 내더니 한 달 뒤에는 인공위성 발사를 빙자해 장거리 로켓 실험까지 했다. 유엔 결의를 완전히 짓밟고 국제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막가파식 행동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며 동네방네 시끄럽게 하는 북한의 ‘악동질’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분노와 국가지도자의 분노는 다르다. 보통 사람은 혀를 차며 욕 한 번 하면 그만이지만 대통령의 분노는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에 휩싸여 앞뒤 안 가리고 내린 즉흥적 판단이 여과 없이 정책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해 보라. 만의 하나 그 판단이 잘못돼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대통령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에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유다. 분노에 눈이 멀면 판단이 흐려지고, 그때 내린 결정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불러올 수 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정책 결정 과정의 제동 장치도 사라진다.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의 서슬 퍼런 분노 앞에서 딴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분노에 휩싸여 지시를 하는데 면전에서 “그건 아닙니다”라고 말할 아랫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대통령의 지시를 120% 이행하는 것이 분노의 불똥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대통령이 일단 결정을 하면 어떻게든 그 결정을 합리화하고, 시키지도 않은 것까지 나서서 하는 것이 정부 부처의 생리다. 대통령의 분노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오히려 증폭된다.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으로 지불하는 달러 현금의 70%가 북한 노동당 서기실이나 39호실을 거쳐 핵무기와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전용되고 있다며 관련 자료까지 갖고 있다고 말했었다. 사실이라면 엄청난 ‘사건’이다. 지금까지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당연한 문제 제기와 함께 WMD 개발자금의 북한 유입을 금지한 유엔 안보리 결의 2094호를 우리가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대통령 결단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려다 오히려 스텝이 꼬인 셈이다.
정부는 북한 영유아에 대한 인도적 지원까지 잠정 중단키로 했다고 한다. 지도자가 밉다고 북한 영유아까지 처벌하는 꼴이다.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설마 박 대통령이 그런 지시까진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필경 밑에서 오버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정권과 영유아를 구분하지 않는 비(非)인도적 처사는 두고두고 정부의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나는 박 대통령이 분노에 휩싸여 즉흥적으로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결정을 내리고, 사드 배치 협의를 시작하라고 지시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냉정을 되찾은 상태에서 열번 백번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라고 믿는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지금 단계에서 개성공단을 닫은 것은 잘못이고, 사드 배치를 결정한 건 성급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박 대통령의 고뇌 어린 결정이 북한의 ‘악동질’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