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 깡패가 되었다고 치자. 으슥한 골목에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아이를 불렀다. 코 묻은 돈을 좀 뜯자고 한 것이다. 아뿔싸, 붙잡고 보니 같이 재수하는 친구의 동생이 아닌가. 내 비록 지질하게 살지라도 그간의 안면을 무시하고 녀석을 무섭게 으를 수는 없다. 얼른 표정을 바꾸고 덕담이라도 건네야 한다. 안다는 것이 엉뚱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등산할 때 나뭇가지를 똑똑 분지르며 가는 이가 있다. 나무의 낭창한 탄력을 제압하는 데 실없는 재미라도 들린 듯하다. 설령 앞을 조금 가로막는다 치자. 그렇더라도 그럴 때 쓰라고 손가락 끝에 물결무늬가 있고 어깨의 관절은 360도를 회전할 수 있다. 그런 성능의 소유자가 왜 이런 무작스러운 행위를 할까. 그건 필시 그가 나무와 안면을 익히지 못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이 완력을 쓰는 때이다. 동네깡패가 그랬던 것처럼 그이가 나무들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차마 그리하지는 못했으리라. 이름을 뻔히 아는 생강나무를 보고 어떻게 그 팔을 부러뜨리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양지꽃의 양양한 얼굴을 어떻게 발로 짓밟으랴.
제법 깡으로 통과한 고등학교 시절. 입시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하루만의 위안이랍시고 간 마지막 소풍은 동래산성이 위치한 범어사 뒤 금정산이었다. 그로부터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금정산을 오르고 있다. 어느 코스였는지 정확한 기억이야 없지만 그때 그 금정산의 한 자락이겠거니 하는 생각만으로도 사무치는 감정이 일어났다. 한 골짜기에 이르니 꽃샘추위 속에서 꽃대를 밀어올리는 얼레지가 밭을 이루었다. 시무룩하게 터벅터벅 걸었던 이 길이 꽃길인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천지삐까리’로 쌓인 낙엽을 뚫고 일어나는 깽깽이풀을 만났다. 붉은색이 감도는 보라색의 꽃잎이 접시안테나처럼 펼쳐진 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에 그만큼 훼손이 심해서 한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기도 했던 귀한 야생화. 입김만 닿아도 꽃잎이 쉽게 흩어질 것만 같아서 깡패 같은 마음을 버리고 멀찍이서 오래 바라본 꽃,
깽깽이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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