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6.10.02. 20:45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재일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던 도쿄제국대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한인들로부터 “우리 변호사”로 불렸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같은 이들이다.
독립기념관 주최로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일본인’을 주제로 한·일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배영미 일본 리츠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이 ‘2·8 독립운동과 요시노 사쿠조’를 주제로 발표했다. 요시노는 20세기 초 일본의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1910년대 일제의 한반도 무단통치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일본의 한인 유학생들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특히 1919년 2월 도쿄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선언한 2·8독립운동을 지지했고, 3·1운동 직후에도 “일본 국민은 반성이 없다. 자신들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첫 과제는 자기반성이 아니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일제가 일본 내 한국YMCA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판단, 일본 교회의 관리 아래 두려고 했을 때도 앞장서서 비판했다.
학술대회에서 ‘일본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일본인 변호사의 활동’을 주제로 발표한 오노 야스테루 일본 교토대 조교수는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를 소개했다. 2·8독립운동을 주도한 최팔용·백관수·서춘 등이 출판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자, 후세는 그들의 변호를 자원했다. 1심 변호를 맡았던 베테랑 변호사 하나이 다쿠조는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정당하며 2·8독립운동은 유죄라고 전제하고, 정상참작을 호소했다. 하지만 후세는 하나이의 변호는 2·8독립운동의 의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며 그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후세는 1924년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과 1926년 일왕가 암살을 계획한 박열 부부의 변론도 맡았다. 재판 당시 김지섭은 ‘사형 아니면 무죄’를 요구했고, 박열은 사형판결 이후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을 거부했다. 오노 교수는 “김지섭과 박열의 변론을 맡은 후세는 감형이라는 피고인의 단순한 이익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독립운동의 대의를 이해하고 있었다”며 “그렇기에 그가 한인들로부터 ‘우리들의 변호사’로 불릴 만큼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노 교수는 “사료에 명기된 한·일 간의 ‘우정’ ‘우호’라는 표현이 미사여구일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하며 우정과 우호의 이면에 갈등도 상존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일본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제국주의의 독소에 물들지 않은 일본인과 그 사례를 발굴하는 것은 일본근대사에 ‘빛’을 부여하는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일본인들을 마냥 낭만화하는 것은 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영미 연구원도 요시노 사쿠조를 가리켜 “누구보다도 조선과 조선인을 깊이 이해했던 대표적 일본인”이라고 평가했으나, 그가 비판한 것은 무단통치라는 일본의 통치방식이지 식민지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배 연구원은 “요시노의 한인 유학생 지원도 식민통치, 특히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의 문화통치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학술회의와 함께 같은 주제의 특별전도 열렸다. 2·8독립운동과 의열단 투쟁 관련 사진 및 실물 자료가 전시됐고 후세 다쓰지가 1925년 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편지도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김지섭은 니주바시 의거로 체포돼 형무소에 갇힌 채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일제가 절차를 밟지 않고 구류기간을 연장한 것에 항의해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김지섭의 변론을 맡은 후세는 편지에서 “김군은 어디까지나 적극적으로 싸워주길 바라고 또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데 단식이라는 소극적 수단으로밖에 싸우지 못하는 불운을 호소한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라며 “김군의 심정을 잘 안다. 허락된 수단을 모두 다하여 싸우고자 하는 강한 신념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결행하도록 했던 것”이라고 썼다.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보통의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에서 찾아보기 힘든 깊은 신뢰와 유대가 편지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심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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