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고봉으로 쌓아 올린 마법… 한국인은 '밥심'이여~

바람아님 2016. 10. 9. 17:59

(조선일보 2016.10.08 어수웅 기자)


삼시세끼 음식언어 由來와 용례… 국어학자가 풀어낸 밥상 인문학

'밥상'보다 '식탁' 우선하는 시대… 우리말에 담긴 삶의 흔적 찾아내


우리 음식의 언어

우리 음식의 언어|한성우 지음|어크로스|368쪽|1만6000원


1년 6개월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미국 스탠퍼드대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를 

소개했다. 요리에 빠진 서양 언어학자가 보여줄 수 있는 '맛있는 인문학'의 정점으로 추천했는데, 

그 지면에 미처 쓰지 못한 아쉬움 한 토막이 있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성과를 찾기 어려운 걸까.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한성우 교수'우리 음식의 언어'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기품 있고 

진진(津津)한 응답이다. 서울대 국문과에서 음운론과 방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국어학자는, 

한국인의 삼시 세끼에 얽힌 어휘의 유래와 용례를 중국 땅과 우리 땅을 가로지르며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그것도 막걸리처럼 넉넉하고 편안한 일화를 섞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밥상 인문학'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장은 '쌀과 밥'이다. 

우선 충남 아산 출신인 이 중견 국어학자의 초등생 시절 체험부터. 시골 초등학교 씨름부였던 '소년 한성우'가 

소년체전 예선을 위해 온양에 갔다. 짜장면 점심을 꿈꾸는 씨름부 소년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교장 선생님이 찾아간 식당은, 

고향 이름 간판 내세운 '아산집'. '다꽝'도 '다마네기'도 없이 차려낸 밥상에는, 국·찌개·김치와 넘치도록 고봉(高峰)으로 쌓아 

올린 밥뿐이다. 원망 섞인 아이들의 눈초리를 야멸차게 딱 한 마디로 정리하는 교장 선생님. "한국 사람들은 밥심이여."



/어크로스·행남자기


첫판에서 탈락한 씨름 소년은 서운함을 뒤로하고 국어학자로 복귀한다. 

'밥심'의 '심'은 '힘'의 사투리니 '밥힘'이라 해야 맞고, 이마저 사전에 없어'밥 힘'으로 띄어 써야 하나, '밥심'으로 해야 

느낌이 산다며, 비슷한 용례의 '뱃심'과 '입심'을 예로 든다. 

하지만 단순히 언어학적 분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데 이 책의 매력이 있다.


어떤 밥그릇이든 밥그릇 안의 양만큼 위로 더 쌓을 수 있던 '고봉(高峰)의 마법'을 묘사하고, 광복 이후 70년 동안 절반으로 

줄어든 밥그릇의 크기를 비교할 때, 이 책은 '쌀밥의 언어학'을 넘어 '쌀밥의 문화사'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밥을 적게 먹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게 먹어도 가능해진 풍족한 세상. 단백질이나 지방은커녕 

푸성귀투성이라 오직 '밥심'에 의존해야 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고기나 버터도 먹다 지쳐 유통기한을 넘기기에 십상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 교수는 '누룽지'의 어근(語根)인 동사 '눋다'의 해체와 결합을 설명하면서, 밥 푸는 어머니 곁에 쭈그리고 

앉아 침 삼키며 기다리던 '가마솥에 누룽지'를 소환하는 것이다.


쌀밥

/양수열 기자


'따로 또 같이'라는 다섯 글자 제목으로 

'따로국밥'을 풀어내는 한 교수의 유머를 보자. 

'따로'는 부사이니 동사나 형용사를 꾸며줘야 

하는데, '국밥'은 명사다. 

어법을 따지자면 '따로국밥'은 있을 수 없는 

조어(造語)인데, 식당 주인들은 국어학자들도 

못하는 이 어려운 일들을 종종 해내는 '괴력'의 

소유자다. 

'섞어찌개' 역시 그렇다. 

여러 재료를 '섞어서 만든 찌개'일 텐데, 

주인 마음대로 다 떼낸 후 '섞어! 찌개'와 같이 

명령하는 이름으로 창조했다. 

한 교수는 "틀렸다는 '지적질'대신 새롭다는 

찬사가 더 어울릴 듯하다"며 

이 '거리의 언어학자'를 예찬한다.


'주식(主食)빵'의 준말이 '식빵'이기 때문에 

식빵은 '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일본어가 

미친 영향을 살피고, 소면·중면·쫄면을 용도를 

비교하면서 '가늘고 길게 사는 법'의 미학을 

강의한다. 국·찌개·탕, 푸성귀·남새·푸새, 

주전부리·군것질거리의 공통점과 차이점 

분석도 친절하다.


국어학자가 관찰한 '밥'은 신기하면서도 

지조 있는 명사다.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말일수록 사투리가 많기 마련인데, '밥'만은 전혀 변화를 겪지 않고 '일편단심 밥'이라는 것. 

'부자' '정구지' '비자' 등 스무 가지 넘는 말로 불리는 표준어 '부추'를 떠올려 보라.


방바닥에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서 먹는 밥상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먹는 식탁으로 바뀐 시대. 

한 교수는 '밥상'과 '식탁'의 가장 큰 차이를 '밥'으로 봤다. 

밥이 주인이어서 '밥상'으로 불리던 것이 '먹을 것'이 주인이어서 '식탁'으로 불리는 것에 자리를 내줬다는 것. 

'우리 음식의 언어'를 언어학과 더불어 문화사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너무나 익숙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우리 말에 얼마나 많은 삶의 흔적과 문화의 향기가 묻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아침식사로 '빵'을 먹었다고 하면 혀를 끌끌 차던 노모(老母)가 떠올랐다. 

결국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일들 아니겠는가. 

'밥상 인문학'의 말 맛, 말 멋을 즐기며, 말까지 살찐다는 이 천고마비의 계절을 만끽하시길.






<<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 >>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댄 주레프스키/ 김병화/ 어크로스/ 2015/407 p

594.5-ㅈ786ㅇ/ [정독]인사자실(이달의책)

594.504-ㅈ786ㅇ/ [강서]2층종합실



관련기사 바로 가기 :


[북리뷰] 음식의 언어

(2015.04.04 이현승 기자)



[기자 추천 도서]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유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