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8만명이 참여하자 51% vs 49%가 되었다.
● 그런데 문제는 이때 이후로 발생하였다.
온라안 투표의 질문을 변경한 것이다.
처음에 찬성과 반대를 동시에 묻던 것을 . 탄핵을 찬성하는지 한가지만 물은 것이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참여를 할 수 없도록 변경한 것이다.
스스로가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의 여론조사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치어업 헌재 관계자는 한겨레신문을 통해, 말도 안되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 놓았다.
"10일 문을 연 ‘치어업헌재’(www.cheeruphunjae.com) 사이트는 11일 저녁 7시께 “조직적인 공격 및 부정한 접근으로 투표와 청원기능이 무력화돼 사이트 운영을 중단한다”
사이트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10일 저녁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이트 주소가 공유됐다. 이후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트래픽 공격이 들어오고 있다”며 “개인차원의 해킹이 아니라, 장비를 동원해 대규모로 트래픽 공격을 하고 있다.
<크메르루주 [Khmer Rouge]> 1967년 결성된 크메르루주군은 베트남과 마지막 전쟁을 벌이던 시아누크가 70년 3월 소련을 방문하던 사이 미국의 비호 아래 론 놀(Lon Nol)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게 되자, 농촌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정부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친미(親美) 우파 성향의 론 놀(Lon Nol) 정권과 5년간의 내전을 벌인 결과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Pol Pot)는 3년 8개월의 통치기간 동안 화폐 사용을 금지하고 지역 곳곳에 집단농장을 세워 도시민들을 수용하는 등 '노동자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킬링필드(Killing Fields)'사건으로 유명한 피의 숙청을 자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70만 명의 지식인들과 반대파들이 처형, 아사(餓死) 등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됐고 이들의 통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회실험으로 기록됐다. 이후 1979년 베트남군과 이들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됐다. 2003년 캄보디아 정부는 유엔과 공동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크메르루주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전범재판소를 만드는 절차에 착수한 후, 2006년 7월 처음 재판부를 구성했다. 이후 다시 2년 반 만인 지난 2009년 2월, 크메르루주 몰락 30년 만에 첫 재판이 시작됐으며, 2010년 7월 악명 높았던 투올슬랭교도소의 카잉 구엑 에바브 소장에게 징역 35년형이 내려졌다. 2011년 11월 21일에는 크메르루즈 공산정권 당시 노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 키우 삼판 전 캄보디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 이엥 사리 전 외교부 장관 및 그의 아내 이엥 티리트 사회부 장관 등 킬링필드 주역 4인방의 전범재판이 시작됐다.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크메르루주 군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뒤 1979년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메르루주 [Khmer Rouge]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
'時事論壇 > 핫 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野 '집권하면 사드 백지화' 솔직하게 밝히라 (0) | 2016.12.15 |
---|---|
전 KBS 부산총국장 "朴대통령 불치병 앓아..그만 괴롭히라" (0) | 2016.12.13 |
"與·野·政 협의체 즉각 가동을..경제 컨트롤타워도 급선무" (0) | 2016.12.09 |
중국 '사드보복'에 정부 속수무책..커지는 외교 공백 (0) | 2016.12.06 |
[삶의 향기] 한 시대가 가고 있다 (0) | 2016.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