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초 출범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국무장관 후보로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를 지명했다. 석유기업인 엑손모빌에서 잔뼈가 굵은 틸러슨은 러시아 영업으로 발군의 경력을 닦았다. 틸러슨은 러시아 석유 프로젝트를 다루면서 푸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위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별도의 변수도 있었겠지만 최소한 이권 협상에서 틸러슨은 러시아의 맥점들을 파악해 잘 파고들었던 모양이다. 틸러슨 지명은 대러 관계를 지렛대로 삼겠다는 트럼프판 대외전략 구상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민간인 국무장관은 미국에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포드자동차의 로버트 맥나마라 사장을 국방장관에 기용해 군에 ‘비용 대비 효과’ 개념을 심었던 케네디처럼 민간 영역의 경쟁력을 국정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미국적 사고의 한 단면이다.
거래에 능한 실용주의자 트럼프의 첫 외교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37년간 금기로 통했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도전장을 던졌다.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총통과 통화하면서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다. 대만 카드는 특히 한반도에 미·중 각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중 진영 논리가 부상하면 남북관계는 격랑에 휩쓸리곤 했다. 기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천영우 전 청와대 안보수석은 “북한 비핵화와 대만 카드는 중국으로선 비교 불가한 가치”라며 “트럼프가 중국의 핵심이익 중의 핵심인 대만 카드를 건드려 중국이 비핵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려는 협상 전술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대만 카드의 현실화 속도에 맞물려 극단적인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행보가 빨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라 밖 형세는 이렇게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와 대만까지 끌어들여 중국과 북한을 압박하는 구도를 짜고 있다. 이런 동북아 안보 빅뱅 속에서 동맹국인 한국은 왠지 주변부로 밀려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안보 지형의 대지진’을 앞두고 총력 대응이 절실한데 최순실 게이트와 대선 정국 등 깊은 늪에 빠진 외교안보 라인이 걱정스럽다.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