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05.30 03:00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미국 조지아 주
사랑이란 두 사람 공동의 경험이긴 하지만 내게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완전히 별개 경험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준 건 '슬픈 카페의 노래'를 쓴 소설가 카슨 매컬러스였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도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반드시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젊은 남자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건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 아이, 아니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다섯 살에 앓은 열병과 연이은 뇌졸중으로 서른 초반에 이미 제대로 걷는 것조차 어려웠던 카슨 매컬러스는 유독 무엇인가 상실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썼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아이들과 집단에 의해 추방당한 이방인들의 이야기들을.
사시가 된 눈 때문에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 180㎝가 넘는 거구에 남자보다 힘이 센 미스 아밀리아. 그녀는 사람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이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제대로 수완을 발휘하는 사료 가게 주인이었다. 그녀는 괴팍스럽기로 소문난 마빈 메이시란 이름의 남자와 딱 한 번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사흘 만에 결혼 생활은 끝나고 만다. 진심으로 아밀리아를 사랑했던 마빈이 괴팍스러운 자신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그 후, 마빈 메이시는 그녀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다른 마을로 건너가 강도질을 일삼다가 교도소에 간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던 아밀리아에게 어느 날 꼽추 라이먼이 나타나고,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키 절반도 되지 않는 못생긴 꼽추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라이먼을 위해 사료 가게를 카페로 바꾼 아밀리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팔 술을 빚는다. 그리고 방직 공장을 중심으로 바쁘고 삭막하게 돌아가던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은 카페로 인하여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그녀가 라이먼을 위해 빚어내는 술에는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이곳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위안을 준 것이다.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준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 그녀가 그에게 선물로 주는 건 자신의 콩팥에서 나온 돌로 장식된 시곗줄이나 콜라병에 꽂힌 백합처럼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녀의 진심에서 나온 선물이었다. 라이먼은 그 선물에 기뻐하거나 딱히 감사를 표시하진 않는다.
"이제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허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사랑의 비극은 어쩌면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 사이의 시차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가장 큰 기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일인 것이다.
어느 날, 감옥에서 출소한 마빈 메이시가 복수를 꿈꾸며 아밀리아를 찾아오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광포하기 짝이 없는 마빈 메이시를 보자마자 라이먼이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못생긴 꼽추 라이먼을 사랑한 아밀리아, 자신을 벌레 보듯 취급하는 마빈과 사랑에 빠진 라이먼, 한때 아밀리아를 사랑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보려 노력했던 마빈. 이 셋의 사랑은 모두 엇갈린다. 결국 마빈과 라이먼은 음모를 작당해 아밀리아를 파멸시키고 도망가 버린다. 한때 마을의 중심이 되었던 따뜻한 카페는 문을 닫고 폐가처럼 변한다. 사랑이 떠나자 마을에도 온기가 사라진 것이다.
아밀리아는 꼽추가 떠난 후, 그를 3년 내내 기다린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어느 날, 카페 건물을 널빤지로 막고 두 번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은둔한다. 그렇다면 함께 마을을 떠난 꼽추와 마빈은 행복할까? 마빈이 꼽추를 서커스단에 팔아넘겼다는 소문부터 마을에 해괴한 이야기가 퍼지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애인의 애인에게'라는 소설에서 이런 문장을 썼었다.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유일하게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리는 '서로' 사랑함에도 '각자'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라는 나의 환상을, '그녀'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은 그토록 환멸 속에서 끝나는 것인지도. 미스 아밀리아처럼 평생 고독 속에서 지나간 옛사랑을 추억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기에, 사랑은 그토록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슬픈 카페의 노래―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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