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백영옥 작가는 2010년부터 많은이들에게 감명을 준 영화,소설등에 대한 작품속 현장을 찾아 작품의 뒷애기를 주제로 조선일보에 장기칼럼을 이어 오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영화만을 다루 었으나 2015년 부터는 소설에 더 치중하여 연재 하고 있다. 따라서 2015년 5월 이후의 칼럼[그 작품 그도시] 와 동아일보의 장기 연재물 [독서일기]를 순번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
조선일보 : 2015.05.16 03:00
소설 '토니 다키타니'―도쿄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을 싱가포르행 비행기 안에서 읽기 시작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화장실에서 끝까지 다 읽었다.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울 수 없어서 책 읽을 곳을 찾았는데, 화장실 안에 마침 근사한 욕조가 보였던 것이다. 욕조에 누워 책을 다 읽었을 땐 새벽 3시 즈음이었다. 시차라고 해봐야 고작 1시간 정도였지만 종일 몽롱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토니 다키타니'를 좋아한다. 평생을 떠돌며 산 재즈 연주자 아버지 밑에서 엄마 없이 자란 토니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야망이 없었던 그로선 큰 불만 없이 미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성장 덕에 그의 그림은 많은 기업의 눈길을 끌었다. 사진보다 더 정밀한 그의 그림이 기업에는 꼭 필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그의 작업을 집까지 받으러 오던 출판사 직원이었다. 이 소설은 옷만 731벌 남긴 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고독한 남자 이야기다.
홀로 그림을 그리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아버지가 남긴 재즈 음반을 들으며 소일하는 게 전부였던 토니에게 고독은 공기처럼 익숙해서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레 다가온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남극의 빙하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남자 친구가 있던 그녀는 고민 끝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서 특이한 점이라면 딱 하나, 그녀의 쇼핑벽이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옷을 좋아해서 신혼여행으로 떠난 이탈리아에선 트렁크에 전부 실을 수 없을 정도로 옷을 사들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토니의 결혼 생활은 완벽했다. 돈은 부족하지 않았고,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는 무엇이든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옷에 대한 아내의 집착이 염려되었던 토니는 그녀에게 쇼핑을 자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내 역시 그의 말에 진지하게 동의한다.
교통사고가 났던 날, 아내는 새로 산 옷을 상점에 반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라 자위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잡는 순간 놓아두고 온 그 옷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생각한다. 옷의 감촉이라든가, 냄새, 그것을 입고 있었을 때 기분 같은 것을 말이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는 맞은편 자동차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토니 다키타니에게 남겨진 것은 방 하나 가득한 사이즈 7짜리 옷 더미뿐이었다. 구두만 해도 200켤레나 되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그는 암담하기만 했다. 아내가 몸에 걸치던 것들을 언제까지 품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장신구류는 업자를 불러 헐값에 가져가게 하였다. 스타킹과 속옷류는 한꺼번에 정원 소각로에 집어넣고 태웠다. 옷과 구두는 너무 양이 많아 그대로 놔두었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는 의상실에 혼자 틀어박혀, 거기에 자리가 비좁다는 듯 걸려 있는 옷을 온종일 바라보았다."
장례식을 치른 열흘 후, 토니 다키타니는 신문에 비서를 모집한다는 구인 광고를 낸다.
"사이즈 7, 신장 161센티미터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성을 구함. 월급 최우대."
최종 면접을 통과한 한 여자에게 그는 아내가 남긴 옷을 대신 입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조건을 얘기한다. 자신을 의심쩍게 바라보는 여자에게 그는 차분히 아내의 죽음에 대해 담담히 말한다.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아내가 죽고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죽은 아내의 옷을 입어준다면 그것을 보며 아내의 부재를 확인하고 나 자신도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아내의 옷을 대신 입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내민 이유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그림자들은 아내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따스한 숨결을 부여받아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잃고 시시각각 메말라가는 볼품없는 그림자 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낡아빠진 옷에 불과했다.
그는 그 옷들을 보고 있는 사이 점점 숨이 갑갑해져왔다. 무수한 색이 마치 꽃가루처럼 공중을 날며 그의 눈과 귀와 콧구멍으로 날아 들어왔다. 탐욕스러운 프릴과 단추와 어깨 장식과 주머니와 레이스와 벨트가 밤 공기를 희박하게 만들고 있었다. 듬뿍 집어넣은 방충제 냄새가 수많은 미소한 날벌레처럼 소리없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이 옷들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고독이 뜨뜻미지근한 어둠의 즙처럼 다시금 그를 에워쌌다. 모두가 이미 끝나버린 일이다, 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모든 것은 이미 끝나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내가 아는 한, 상실에 대해 말한 가장 아름다운 단편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 포스터 사진을 한동안 내 방에 걸어 놓기도 했다. 그녀는 거대한 옷장 안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데, 푸른 기운이 감도는 옷장은 도쿄라는 욕망이 들끓는 고독한 도시를 극적으로 축소해 옮겨놓은 것 같았다.
하루키는 단편 '독립기관'에서 여자들에게 결정적인 순간 어떤 죄의식도 없이 중요한 거짓말을 하(고야 마)는 독립기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단 얘길 한 적이 있다. 문득 '토니 다키타니'에 나오는 푸른빛으로 가득 찬 옷장이 꼭 아내의 위장(胃臟)처럼 느껴졌다. 마음 둘 곳을 옷에서 찾은 사람은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을까. 그녀가 미처 소화하지 못한 옷과 장신구들이 쓸쓸하게 놓여 있는 자리의 그림자가 눈에 가득 차올랐다. 외로움의 크기만큼.
●토니 다키타니―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 수록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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