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바람아님 2017. 1. 1. 18:00

(조선일보 2016.12.31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섣달 그믐날


뒤숭숭하게 밤 지새우며 앉아 있다가

멍하게 졸린 눈으로 아침 맞았네.

제멋대로 육신은 늙고 병들고

세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흘러가누나.


도부(桃符) 붙여 축원할 일 뭐가 있겠나.

새로 담근 잣잎술도 탐내지 말자.

오로지 바라나니 가슴에 담긴

본연의 참모습을 빨리 깨달아야지.

除日


忽忽坐終夕(홀홀좌종석) 

到晨(혼혼수도신)

形骸從老病(형해종노병) 

曆紀任冬春(역기임동춘)


不用桃符祝(불용도부축)

休耽柏葉新(휴탐백엽신)

惟須方寸內(유수방촌내) 

早認本來眞(조인본래진)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이 쉰한 살을 앞둔 1633년 섣달 그믐날의 심경을 썼다. 

풍속에 따라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고 있다.

 

한 해를 보내려니 뒤숭숭하고, 밤을 새우려니 멍하기만 하다. 

나이 오십 줄에 들고 보니 몸은 늙고 병들고, 계절은 바뀌어 벌써 겨울이다. 

또 바로 봄이 될 것이다. 

그 모든 변화가 내 의지나 소망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새해가 되면 도부(桃符, 새해에 악귀를 쫓는 부적)도 붙이고 잣잎술도 마시면서 운수가 잘 풀리기를 기원한다. 

세상 풍습이니 남들처럼 나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 

정작 필요한 것은 외형이나 물질이 아니라 사방 한 치의 가슴이다. 

올해는 마음이 본래 가진 진정성을 인정하고 양심이나 상식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 


더 배울 것도 얻으려 애쓸 것도 없다. 

누구나의 마음속에 이미 다 가진 것을 확인만 하면 된다.


도부(桃符) :

[명사] 중국에서 설날 아침 같은 때에, 

마귀를 쫓기 위하여 문짝에 붙이던 작은 나뭇조각. 

복사나무로 만들며 길하고 상서로운 문자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