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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白衣)민족과 백인(白人)의사

바람아님 2017. 1. 2. 23:31
[J플러스] 입력 2017.01.01 21:06

  큰 기와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곳에는 팔작지붕의 한옥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제각각 어떤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똑같은 침구가 나란히 마련돼 있고, 남녀를 막론하고 온통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상투를 틀고 흰 옷을 걸쳐 입은 사람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옆에는 푸른눈의 서양인이 흰 가운을 입고 진찰을 하고 있다...

  1885년 고종시기, 미국인 의사 겸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의 건의로 개설된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濟衆院)'의 모습이다. 초기의 제중원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넓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병원의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한옥의 방은 온돌방이어서 침대가 아닌 요를 깔아 사용하였다. 온돌 형식의 병실은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다. 전체를 병실로 사용할 수 있어서 아주 경제적이었다. 따뜻하고 침대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어서 낙상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다. 점차 1900년대에는 병실에 침대가 놓여지고, 차츰 병원 건물이 현대식 건물로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 세종이후 한의학(韓醫學)에서, 침을 놓고 뜸질하는 침구의(鍼灸醫)나 부스럼을 다스리는 치종의(治腫醫)같은 분야의 전문가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교적인 관습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과거에는 전통의학과 미신에 몸을 맡기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기 때문에 초기의 서양의학은 조선인들에게 불신을 안겨 주었다. 조선인들이 질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조금씩 바뀐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의료 활동과 계몽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서양 의학의 발전으로 전통 의학이 폄하되는 부분도 있었고,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활동을 했던 서양인도 있었다. 또한 '신문물(新文物)'이 여러 경로로 복잡하게 들어오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잠식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구문물(舊文物)'을 모두 '신문물'로 대체해야만 문명인으로 생각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진보주의적인 발상이다.

  구한말에 나타난 '의료의 근대화'는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한국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조선인들의 위생관념을 조금씩 변화시켰고 자기 '몸'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초기 서양의학에서는 신분 사회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우리의 의식 속에 서서히 스며든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스스로 성찰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급속하게 적응해야만 하는 근대의 또 다른 일면이다.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