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 안 되려면 믿고 싶은 얘기만 믿는 본능 이겨내야
나무에 스파게티가 주렁주렁 열리고, 펭귄 떼가 유유히 하늘을 난다. 도깨비의 변덕이 빚어낸 이변이냐고? 영국 공영방송 BBC가 각기 1957년과 2008년에 보도한 내용이다. 짐작하셨겠지만 이들 보도가 나온 날짜는 바로 4월 1일. 맞다. 만우절 특집 기사였다. 당시 이 신기한 나무의 재배법을 묻기 위해 시청자 전화가 빗발치자 BBC 측은 “토마토 소스 깡통에 나뭇가지를 심어놓으면 무럭무럭 잘 자란다”며 천연덕스레 답변까지 해줬다.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국내 언론 역시 이런 장난질에 깜빡 속아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국제부 기자들끼리 4월 1일만 되면 서로서로 “속지 말자!”고 다짐해 봐도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망신살이 뻗치곤 했다. ‘영국 총리실이 모델 출신 프랑스 대통령 부인 카를라 브루니를 영국인들의 촌티를 벗겨줄 패션 교사로 임명했다’는 가디언 기사에 꼼짝없이 낚인 2008년도 그랬다. 웃자고 쓴 기사를 “맞아, 영국 사람들은 옷을 못 입어도 너무 못 입어”라며 ‘100% 진지 모드’로 받아들였으니 부족한 유머 감각을 탓해야 할까.
그런데 BBC와 가디언의 악의 없는 장난 기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가짜 뉴스’ 탓에 요즘 세계 각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헛웃음을 유발하는 정도를 넘어 실질적 피해를 주는 데다 고의로 이득을 노린다는 점에서 악질이다. 지난해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에 범람했던 거짓 기사들이 대표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힐러리가 테러단체 IS에 무기를 판 사실이 확인됐다” “힐러리 e메일 스캔들을 수사하던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살해당했다”….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이들 기사가 꽤나 기여했다는 지적이 많다. 누가 봐도 새빨간 거짓말인데 속은 이가 몇이나 되겠느냐고? 선거 직전 석 달 동안 상위 20개의 가짜 뉴스가 상위 20개의 진짜 뉴스보다 더 많이 공유되고, 더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았다고 하니 결코 장난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얼토당토않은 가짜 뉴스에 민심이 동요하는 건 왜일까.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가 이른바 ‘반향실(echo chamber)’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세상이 갈수록 양극단으로 분열돼 가면서 자기 생각과 비슷한 주장만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그런데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뉴스는 마치 메아리처럼 내 의견과 딱 맞아떨어지니 덮어놓고 믿게 된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카톡방에 넘쳐나는 가짜 뉴스도 마찬가지다.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를 입증할 결정적 물증인 태블릿PC를 문제 삼는 게 대표적이다. “(JTBC가) 훔친 걸로 몰아가라”는 최순실씨 육성 녹음이 공개되고 제2의 태블릿PC가 나온 뒤까지도 그런 카톡을 철석같이 믿는 지인께 이유를 묻자 대답은 이랬다. “나는 보기 싫은 뉴스 나오는 신문·방송은 일절 안 보고 지인들이 보내는 카톡만 본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오히려 정보를 접하는 통로는 좁아지는 아이러니가 기막히다. 지긋지긋한 ‘확증 편향’, 즉 자기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증거만 믿고 반대 경우는 무시하는 본능 탓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2004년 미국 대선 때 미국 에머리대 연구팀이 열성 공화당원과 열성 민주당원들에게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발언을 듣고 잘잘못을 평가해 달라는 주문을 해봤다. 그 과정에서 양측의 뇌를 스캔해 보니 ‘배외측 전전두피질’은 잠잠한 반면 ‘안와 전두피질’만 분주하더란다. 이들 부위는 뇌에서 각각 논리적 판단과 감정 처리를 담당한다. 사람들이 지극히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도 좋고 싫은 감정이 옳고 그른 논리를 압도한다는 얘기다.
일단 이런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넘쳐나는 가짜 뉴스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 첫걸음일 게다. 다음 단계론 내 귀에 불편한 뉴스라도 억지로 접해 균형을 잡으려 애써보자. 그래야 얼마 남지 않은 다음 대선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 없는 선택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바보 같은 정치를 똑똑한 시민이 넘어서야 한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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