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용 논설위원
9년여 전으로 기억된다. 한국은행이 5만 원권 지폐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하자 진보적 페미니스트들이 반발했다. 가부장적 가치관에 기초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라 부적합하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여성계 일각에서는 한은의 ‘결단’을 반겼다. 이들은 “화폐 인물은 시대정신의 상징이다. 36년 만에 등장하는 최고액권에 여성이 들어가는 건 환영할 일”이라고 받아쳤다.
요즘 신사임당 ‘허상 깨기’ 열풍이 불고 있다. 소설과 역사서, 드라마를 통해 현모양처 신화 속에 갇힌 신사임당이 ‘슈퍼 워킹맘’으로 환생하고 있다. 최근 나온 관련서만 30여 종에 이른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한목소리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녀교육에 살림도 하고 그림까지 그리며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한 여인’. 역사적 기록들만 봐도 ‘신사임당= 현모양처’라는 공식은 그로선 억울할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작품·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성리학 질서에 반해 결혼 직후 19년간을 친정에서 보냈다. 남편이 있는 서울을 떠나 강원도 평창 등지에 살며 예술 작업에도 전념했다. 자신의 존재가 아내와 어머니에 국한되는 걸 거부한 셈이다.
신사임당 ‘평가절하’에 앞장선 인물은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 송시열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를 띄우기 위해 신사임당 이미지를 ‘천재 예술인’이 아닌 ‘이이의 어머니’로 부각시키려 애썼다. 그런 여인상에 쐐기를 박은 장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10월 유신을 정당화할 국민 정신교육 소재가 절실했던 1970년대 중반, 그는 국난 극복의 성웅 이순신과 짝을 이루는 ‘민족의 어머니’로 신사임당을 동원했다.
며칠전 방영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주인공 이영애는 제작 발표회에서 기자들에게 “500년 전 신사임당이 5만 원권과 같은 박제된 이미지만을 원했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즈음 5만 원권 발행 잔액이 지난해 말 75조7751억 원으로 7년 6개월 새 7.6배로 불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체 화폐 발행 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77.8%로 늘었다. 환수율도 50% 가까이로 올라갔다. 5만 원권은 현재 ‘지하경제의 기축통화’로 지탄받지만 수표발행 비용 절감, 편의성 증대, 손쉬운 화폐 관리 등 장점도 적잖다. 신사임당의 재조명을 계기로 5만 원권도 ‘대장 화폐’로서 그 명예가 회복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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