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에서 최고 실세로 꼽힌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출세 가도를 달린 조윤선(51)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1일 동시에 구속됐다.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을 설계하고 집행한 혐의와 관련해 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법원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기소한 특검팀은 청와대와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하며 문화·예술 분야에 개입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상·표현·언론 자유를 침해한 반헌법적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블랙리스트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가 즉위한 16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투옥된 죄수 명단이나 숙적을 기록한 살생부 등은 그전에도 존재했으나 블랙리스트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찰스 2세는 1649년 선왕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혁명 주역들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살생부를 작성했다.
청교도혁명 후 공화정을 도입한 의회는 찰스 1세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고 대법원을 설치했다.
권력을 남용한 절대왕정 때와 법 절차를 준수한다는 명분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단죄는 초법적으로 이뤄졌다.
재판이 속전속결로 이뤄져 1주일 만에 찰스 1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사흘 후 단두대에 올려져 참수형이 집행됐다.
19세 때 이 광경을 지켜본 아들 찰스 2세는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즉위하자마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복수할 대상자 59명을 적은 명단이다.
청교도혁명을 주도한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핵심 추종자, 찰스 1세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등이 당사자다.
38명은 이듬해인 1661년 1월 30일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날은 찰스 1세가 12년 전에 죽은 날이다.
크롬웰은 3년 전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는데도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교수대에 매달렸다가 목이 잘렸다.
반역의 괴수라는 이유로 6m 높이 장대 끝에 머리가 꽂혀 웨스트민스터 홀에 내걸렸다.
이 사건은 1504년 피바람을 불러온 조선의 갑자사화를 연상시킨다. 당시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폐비에 가담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했다.
찰스 2세가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집단 학살을 했다면 연산군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머니 정적들에게 피의 보복을 했다.
찰스 2세와 연산군의 말년이 불운했던 것도 닮은 점이다.
찰스 2세는 1685년 자식 한명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왕위를 계승한 동생 제임스 2세는 가톨릭을 확장하려다 불과 3년만에 폐위됐다. 이른바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도망쳤다.
연산군은 학정과 방탕한 삶을 일삼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강화도로 쫓겨가 두달만에 역병으로 사망했다.
1940년대 미국에서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좌파 성향의 극작가, 영화감독, 배우의 활동을 막으려고 작성한 명단이다.
정부 대신에 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가 좌파 색출에 나선 점이 요즘 한국과 다른 점이다.
사상이 의심되는 문화계 인물을 의회로 불러 신념을 밝히라고 강요했다가 거절하는 인물 10명을 국회모독죄로 고발했다.
이들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며 법정싸움을 연방대법원까지 끌고 갔으나 결국 6월~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를 비난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이들로 인한 시민 표현의 자유가 더 크게 침해됐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문화계 인사들은 좌파라는 근거도 없다.
세월호 관련 성명에 서명하거나 문재인 등 야권 정치인을 지지한 인물 등이 주류다.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인일지라도 창작의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문화융성은 꽃을 피울 수 있다.
문화융성이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의 하나라는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자가당착이자 자기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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