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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아버지의 짐

바람아님 2017. 2. 23. 23:23
중앙일보 2017.02.23 01:01
박정호논설위원
소설가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에는 거지대장 박영철 얘기가 나온다. 6·25 당시 ‘구걸의 자유’를 찾아 대구로 피란 간 인물이다. 남하한 이유가 희비극이다. 텅 빈 서울에서 공산당이 거지들은 기생충이라며 한강에 쓸어 넣겠다고 협박하자 박씨는 40여 무리를 이끌고 주 활동무대인 청계천을 떠났다. 그는 자유대한의소리 방송 인터뷰에서 “그리운 청계천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구걸할 날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아나운서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자유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청계천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씁쓸했다. 몸뚱이밖에 없는 거지가 구걸할 자유를 호소하는 게 우스꽝스러웠고, 또 고귀한 자유가 눈앞에 있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꺼림칙했다. 서울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피란을 가려면 질서를 지켜 문명한 국민의 성숙도를 보여 달라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나온 무렵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64년이 지났다. 하지만 소설 속 이 장면은 마치 오늘을 비추는 듯하다. 대통령 탄핵 무효를 외치며 서울시청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들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모든 생명이 위협받는 전화(戰火) 속에서 생뚱맞게 걸인의 자유를 부르짖거나, 국정 농단 증거가 속속 나왔는데도 ‘멸공의 횃불’을 틀어대는 심정은 어쩐지 닮은꼴이다. 태극기·성조기 현장을 둘러봤던 작가는 ‘기아의 정서’ 한마디로 표현했다. “엔진이 공회전하듯 해방 후 70년간 같은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공터에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가장자리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의 변두리 인물을 돌아본다. 시대를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달픈 일상은 ‘아버지의 짐’으로 요약된다. 그토록 부정했던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려 했지만 질긴 인연의 사슬에 묶여 있는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촛불과 태극기의 어불성설 충돌은 그 짐의 결정판이다.


올해 일흔인 작가는 소설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의 입을 빌려 고백한다.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아버지가 한평생 끌고 온 시간과 지고 온 짐이 소멸할 수 있을까.” 우연인지, 의도인지 주인공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측근의 총에 쓰러졌던 79년 겨울이다. 구체제의 틀을 깨려고 용틀임하는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또다시 아버지의 짐을 대물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