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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알퍼의 한국 일기] '나 홀로 집에'를 꿈꾸는 남자들

바람아님 2017. 2. 28. 07:06

(조선일보 2017.02.28 팀 알퍼 칼럼니스트)


영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집안 질서 잡는 건 여자들

어머니, 아내가 집을 비우면 규칙 탈출을 꿈꾸던 남자들은 

똥밭을 뒹구는 돼지처럼 '지저분한 평온'을 즐긴다


팀 알퍼 칼럼니스트

인기 방송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는 많은 한국인에게 싱글 라이프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 등장하는 남자 연예인들은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혼자서 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당당하게 적혀 있다. 

'대한민국 1인 가구 453만 시대,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 연예계 역시 3분의 1은 1인 가구.'


한국의 트렌드를 쥐락펴락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혼자 산다면, 아마도 미래에는 더 많은 젊은 남자가 

혼자 살게 되지 않을까. 

나 또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혼자 살았는데 한국의 독신남과 내 모국인 영국의 독신남에겐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다. 

영국인은 대개 18세부터 혼자 산다. 대학에 진학할 때, 고향이 아닌 다른 도시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대다수는 그렇게 3~4년을 살고 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남자에게 부모의 집을 떠나 혼자 사는 첫해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나날이다. 

내가 처음 혼자 살았던 곳은 작은 기숙사의 손바닥만 한 방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방은 1년 내내 여기저기 벗어 던진 옷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침대는 어수선하며 언제나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벽에는 반쯤 벗은 여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씩 청소기를 돌리면서 내게 방 좀 치우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내가 반쯤 벗은 여자들 사진을 벽에 붙이면 어머니는 그것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10대 시절 테크노 뮤직을 즐겨 들었는데, 어머니는 내 방 문을 열고는 시끄러운 음악 좀 끄라고 하셨다. 

그러니 대학 시절을 보낸 시끄럽고 지저분한 그 방은, 마치 자기 똥 위를 신나게 뒹구는 돼지처럼, 

부모님의 규칙을 거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던 반항의 소굴이었던 셈이다.


엄마이든 아내이든 가족과 함께 사는 모든 남자는 잔소리와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산더미 같은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싶어 하는 남자는 없다. 

사실 많은 남자가 옷가지가 구겨지거나 말거나 구석에 쌓아 놓고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영국이나 한국이나 모든 집은 여자가 통제한다. 

그래서 만약 어머니가 며칠 여행을 가시거나 맞벌이 아내가 출장을 가게 돼 갑자기 혼자 있게 되면, 

우리 남자들은 자유로움을 만끽할 드문 기회에 만세라도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집에 홀로 남겨진 남자는 10대 시절로 돌아간다. 

우리는 속옷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 맥주를 병나발 불며 "꺼억~!" 하고 시원하게 트림할 수 있다. 

유혈 낭자한 UFC(종합격투기)를 마음껏 봐도 "그걸 꼭 봐야 해?"라는 핀잔도, 언짢아하는 한숨 소리도, 

쯧쯧 혀 차는 소리도 들을 일 없다. 한국에서 집에 홀로 남겨진 남자는 대개 라면을 먹는다. 

TV나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냄비째로 라면을 먹는 장면은 "내게 여자 따위는 필요 없어"라는 피켓 시위라도 하는 것 같다. 

라면 먹은 설거지조차 귀찮다면 컵라면과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선택하면 된다.


영국 남자에게는 '치즈 샌드위치'가 라면 노릇을 한다. 잘라진 빵, 칼, 체다 치즈 덩어리, 접시만 있으면 된다. 

샌드위치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30초 정도 돌려서 치즈를 약간 녹여 먹으면 더욱 맛있지만 그냥 먹어도 된다. 

영국의 한 일간지가 40년간 오직 치즈 샌드위치만 먹었다고 주장하는 노년의 독신 남성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그의 건강 상태가 궁금했는지 어느 의사가 검사해봤더니 남자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컵라면에 해당하는 음식도 있다. 바로 토마토소스로 조리한 콩 통조림(baked bean)이다. 

약간의 호사를 떨고 싶다면 콩 통조림을 냄비에 데워 버터 바른 빵에 올려 먹으면 된다.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한 독신남이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버터 바른 빵에 콩 통조림을 올리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우리가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 비타민, 무기질을 모두 섭취할 수 있어."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이 원해서, 또 누군가는 우리 같은 남자를 견뎌줄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 

다른 누군가는 운명에 의해 혼자 산다. 

나머지 남자들은 사랑하지만 조금씩 천천히 우리 어머니처럼 변해가는 잔소리꾼 아내에게 적응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남자는―한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유부남이든 독신남이든―때때로 마음속에 갇혀 있던 돼지를 풀어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혼자만의 지저분한 평온' 속으로 탈출을 꿈꾼다. 저속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 

라면이 가득한 양은 냄비, 혹은 통조림에서 막 꺼낸 차가운 콩이 주는 요상한 편안함을 즐기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