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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문학산책] 아지랑이 아물아물 고양이 기지개 켜고

바람아님 2017. 3. 30. 23:39
조선일보 2017.03.30. 03:13

이장희 詩의 주인공 되고 소세키를 文豪 반열에 올린 문학 속 고양이들은
인간 못지않게 이중적이고 담백함 즐기는 탐미주의자
읽다 잠들면 그 또한 꿀맛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시인 이장희는 1924년 시 '봄은 고양이로다'를 발표했다. 햇살 폭포 속에서 몽롱한 고양이를 봄 향기의 실물(實物)로 묘사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고양이의 눈에서 '미친 봄의 불길'을 봤고, 고양이의 입술에서 '포근한 봄졸음'을 떠올리더니, 고양이의 수염에서 '푸른 봄의 생기'가 빛나게 했다. 그의 상상력은 꽃향기와 아지랑이를 뒤섞어 고양이에게 덧씌움으로써 고양이를 봄의 화신(化身)으로 빚어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인들의 고양이 사랑은 유별나다. T S 엘리엇은 "고양이에겐 이름이 세 개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사람들이 보통 부르는 이름, 하나는 좀 더 개성적인 이름, 또 하나는 고양이만이 아는 이름"이란다. 사람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서 소유한다고 해서 고양이의 독립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고양이의 실명은 사람에겐 무명(無名)으로 남아 영원히 미지의 영역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고양이 덕분에 문호(文豪)가 됐다. 그는 1905년 첫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는 첫 문장이 유명하다. 그 이름 없는 고양이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근대에 들어선 일본의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세태 풍자를 늘어놓는다.


지난해 소세키의 사후(死後) 100주년을 맞아 국내 출판사 현암사가 14권짜리 소세키 소설 전집을 완간했을 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송태욱 옮김)가 첫 권이었다. 올해는 소세키의 탄생 150주년인데 최근 서은혜 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새 번역본을 내놓았다. 기존 번역본과 달리 '이 몸은 고양이야'란 제목을 달았다. '이 몸은 고양이야. 이름은 아직 뭐, 없고'라며 본문도 구어체로 과감하게 바꾸었다. 까칠하고 시건방진 고양이가 한국 독자에게 건넬 말투를 상상하다 보니 번역 관행을 깨뜨렸다고 한다. 가령 '나는 새해 들어 다소 유명해졌으니 비록 고양이지만 다소 자부심이 드는 것 같아 흐뭇하다'고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을 '이 몸이 신년 초에 약간 유명해져서 고양이치고는 살짝 콧대가 높아졌으니 좋은 일이지?'라고 색다르게 옮겼다.

이 소설에선 고양이가 글도 읽을 줄 알다 보니 그 녀석을 기특하게 여긴 하이쿠도 나온다. '書を讀むや躍るや猫の春一日'. 번역자에 따라 '봄날 책 읽고 춤추는 고양이의 하루'라거나 '글을 읽느냐 춤을 추느냐, 고양이의 봄날 하루'라고 옮겼기에 저마다 말맛의 차이가 난다. 똑똑한 고양이도 봄날의 들뜬 기분에 아니 놀지는 못하리니, 더 앙증맞고 귀엽다는 예찬이다.


이 소설의 고양이는 영어 교사인 주인이 지식인을 대표하는 손님들과 나눈 대화를 듣곤 그들의 위선과 허풍, 속물근성을 유쾌하게 조롱한다. 그들이 속물들을 욕하지만, 알고 보면 한통속이라고 비꼰다. 그런 고양이도 인간 못지않게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고양이가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떡국을 보곤 남몰래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 대목이 그러하다. 고양이는 처음엔 먹지 않으려고 하다가,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내년까지 떡이란 것의 맛을 모르고 살아야 한다'며 이를 악문다. 고양이는 '얻기 힘든 기회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 한다'며 자신의 '도둑 고양이' 노릇을 합리화한다. 동시에 고양이는 '사실 떡이 먹고 싶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만약 사람들이 나타났다면 먹지 않았을 거란다. 제발 누군가 나와서 말려주길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 고양이는 '나는 결국 떡국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세상을 원망하듯 떡을 덥석 문다.


그래도 이 고양이는 '나는 담백함을 사랑하는 다인(茶人)풍의 고양이'라고 뽐낸다. 탐미주의자이기도 하다. 암고양이의 둥그스름한 등이 지닌 곡선미의 극치에 감탄할 줄 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우아하게 앉은 단정하고 정숙한 자세를 좋아한다.

소세키의 고양이 소설에 영향을 미친 작품도 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소설가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박은경 옮김)이다. 고양이와 인간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희귀한 서술 기법을 구사했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전위적인 소설로 꼽힌다. 


시인 보들레르는 고양이를 천사, 요정, 신(神)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눈을 발견하곤 놀라기도 했다. 20세기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소설가 보르헤스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엔 꿈결 같은 유리가 가로놓여 있다고 했다. 인간은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살지만, 고양이는 순간의 영원 속에 살기 때문이란다. 이처럼 고양이로 수놓은 세계문학사를 섭렵하다가 춘곤증에 밀려 설핏 잠이 들면 꿀맛이겠다.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때 봄은 더 짙어질 것이니, 책 읽고 춤추는 고양이의 봄날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