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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노비 안용복' 울릉도 지킨 대가는 귀양살이

바람아님 2017. 3. 31. 23:11
연합뉴스 2017.03.31. 09:01

한국과 일본이 동해 훈련 문제로 신경전을 펴고 있다.

독도방어훈련 계획에 일본이 딴죽을 건 탓이다.

일본은 훈련을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 태도를 보인다.

독도 야욕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한국 해군은 훈련 중단 요구를 일축했다.

부산 수영사적공원 내 안용복장군 동상. 안 장군은 조선 숙종 19년과 22년 두차례 독도를 침략한 왜인들을 물리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막부로부터 독도가 조선땅임을 확약받아온 분이다. /지방/부산수영구 제공.

독도는 고문서와 위치, 실효지배 등으로 보면 우리 땅이 명백하다.

일본은 이미 1696년 울릉도와 부속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했다.

당시 울릉도 주권을 확보한 영웅은 노비 출신 안용복이다.

부산에서 해군 병사로 근무하던 안용복은 울릉도 파수꾼을 자임했다.

주변 해역에 불법어로가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주요 섬 주민을 뭍으로 이주시킨 틈을 타 일본 어선이 울릉도 바다를 차지했다.

안용복이 울릉도를 처음 찾아간 것은 1693년이다.

그때 고기잡이를 하던 일본 어선을 발견한다.

안용복은 당장 퇴거하라고 소리를 질렀다가 도리어 납치된다.

숫자에 밀려 저항할 수 없어 그냥 끌려가야만 했다.


돗토리 현에 도착한 안용복은 영주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알리고 어업 중단을 강하게 요구한다.

평소 부산 왜관(대마도인 거주지)을 드나들며 일본어를 익힌 덕에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하는 문서도 요구했다.


영주는 자기 권한 밖이라며 이를 중앙정부(막부)에 보고한다.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는 편지를 써주도록 했다.

서신에는 섬 문제로 분쟁을 빚는 것은 옳지 않으니 불법어업을 중단하라는 내용도 담겼다.

이로써 울릉도 소유권을 굳히는 듯했으나 돌발 변수가 생긴다.

조선 숙종때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은 안용복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자 장군이 타고 간 도일선이 복원된 모습. 2016.4.18 [부산발전시민재단]

안용복이 귀국길에 대마도로 끌려가 편지를 빼앗긴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감금돼 무사 귀환도 어렵게 됐다.

안용복은 고문까지 당해가며 고생하다 2년 만에 풀려난다.


그 사이에 울릉도 해역은 일본 어선들이 다시 장악했다.

절대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안용복은 1696년 선원 11명과 함께 다시 출동한다.

안용복은 해상 감시관 행세를 하며 즉각 퇴거를 명령한다.

공직자 신분으로 위장한 전략은 주효했다.


일본 어부들이 반항 없이 달아난 것이다.

안용복은 이들을 쫓아 돗토리 현 영주를 만난다.

조선 정부 명의로 위조한 항의서도 전달한다.

영주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울릉도와 독도 침범 어부를 처벌할 것을 약속한다.

막부는 잘못을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서한을 쓴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편지는 "다케시마(독도)에 사람이 거주한 적이 없다. 돗토리 현에서 640km 떨어졌지만, 조선에서는 160km에 불과하다. 의심할 바 없이 조선 영토이다"라고 적었다.


뭍과 섬 거리를 기준으로 섬 소유권 여부를 결정하는 일본 관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국 우호 관계를 헤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편지는 강조한다.

울릉도 해역에서 일본인 어업을 영원히 금지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부 관리도 못하는 외교 성과를 노비가 거둔 것이다.


그런 안용복을 기다린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강원도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공직 사칭 및 공문서위조, 국경 이탈 등 혐의로 목숨을 잃을 위기를 맞았다.

조선 조정은 사형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영토를 지킨 공로를 고려하면 선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영의정 남구만은 역사적 쾌거라는 칭찬도 했다.

처벌 불가피론도 만만찮았다.

불법을 묵인하면 모방 범죄가 속출한다는 우려에서다.

불안한 국내외 정세도 처벌론에 무게를 보탰다.

당시 사회·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유증이다.

전쟁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은 사소한 불씨도 용인할 수 없었다.

안용복이 일본 정부를 압박한 사실에 큰 부담을 느낀 이유다.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분쟁을 촉발하는 사안이었다.

결국, 안용복을 살리되 귀양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실학자 이익은 안용복을 영웅호걸로 치켜세웠다.

미천한 군인이 목숨을 걸고 오랜 분쟁을 끝내고 영토를 되찾은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울릉도 영유권 확약 이후 조선 말까지 아무런 해양 분쟁이 없었다.


한국 외교부는 안용복의 행적을 더듬어 외교 전략을 짜는 데 적극 활용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 미국 사이에서 한국 존재감이 요즘 사라졌기 때문이다.

안용복의 사즉생 정신은 모든 외교관이 좌우명으로 삼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