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물씬한 추사(秋史)의 편지 한 통을 읽는다. "봄의 일이 하마 닥쳐, 한식과 청명에 화풍(花風)이 연방 붑니다. 과거 추위로 괴롭던 기억은 잊을 만합니다그려. 이때 함(咸)이 와서 보내신 편지를 받고 보니 기쁜 마음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편히 잘 지내시는 줄 알게 되니 더욱 마음이 놓입니다.(春事已到, 寒食淸明, 花風陣陣. 過去之苦寒, 亦可忘矣. 卽於咸來, 承接惠書, 欣暢滿懷. 且審邇候安勝尤慰.)"
한식과 청명의 시절에 꽃을 재촉하는 화신풍(花信風)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 바람이 한번 쓸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꽃들이 우르르 피어난다. 겨우내 옹송그려 화로를 끼고 앉아 벌벌 떨던 기억이 언제 적 얘긴가 싶다. 겨울엔 그렇게 춥고 괴롭더니, 이제는 기가 쫙 펴져 온몸에 피가 잘 돈다. 여기에 더해 반가운 그대의 소식까지 들으니 무척 기쁘다는 안부 편지다. 71세 나던 1856년 청명 시절에 썼다.
고려 때 충지(冲止·1226~1292) 스님은 '한중잡영(閑中雜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비 온 뒤 담장 아래 새 죽순이 솟아나고, 뜰에 바람 지나가자 지는 꽃잎 옷에 붙네. 온종일 향로에 향 심지 꽂는 외에, 산 집엔 다시금 아무 일도 없다네.(雨餘牆下抽新筍, 風過庭隅襯落花. 盡日一爐香炷外, 更無閑事到山家.)" 대밭에 죽순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 비 맞은 꽃잎이 옷에 붙는다. 가고 오는 자연의 이치를 물끄러미 내다보며 오늘도 종일 일 없는 하루를 보냈다. 산사의 시간이 적막한 물속 같다.
다시 노산 이은상의 시조 '개나리' 한 수. "매화꽃 졌다 하신 소식을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매화 꽃잎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곳엔 지금 노란 개나리가 한창이지요. 주고받는 글 속에 어느 쪽도 봄이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입에 담는 순간 봄이 문득 달아날까 봐.
미세 먼지로 시계(視界)가 흐려도 진진(陣陣)한 화풍(花風)에 꽃이 피어 봄이 왔다. 남녘에선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첫 순을 따서 햇차를 덖는 손길들이 분주해질 것이다. 이 봄에 나는 어떤 새 결심을 지을까?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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