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가설이란 게 있다.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하는 이론이다. 가이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을 뜻한다. 한 벌의 옷과 양말만으로 간단히 포장된 채 잠시잠깐 살아가기에 급급한 존재로서 지구를 운운한다는 게 참 가당치 않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겪어냈다는 것, 지상의 한 표면을 엄연히 내 두 발로 돌아다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나를 밑천으로 눈앞의 환경과 일대일로 대결하고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처지에서 가평 명지산의 어느 골짜기를 헤매고 헤맸다. 아침에 호기롭게 출발한 해를 따라 정상에 올랐다가, 서산으로 굴러떨어질 즈음 물소리가 졸졸졸 편안하게 귀를 간지럽히는 개울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뻐근한 다리도 식힐 겸 소리의 정체도 확인할 겸 숲 안으로 들어서니 이끼가 잔뜩 포진하고 있다.
물은 물대로 저희들끼리 어울려 내려가는 가운데 어느 잔칫집에라도 온 듯 봄기운이 왁자지껄했다. 어느 손바닥만 한 돌이 눈에 띄었다. 돌에 묻은 이끼와 지푸라기는 그 누군가가 쓴 낯선 문자 같기도 하다.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돌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세상으로 나오는 건 금괭이눈이었다.
산괭이눈, 애기괭이눈, 선괭이눈, 가지괭이눈 등 비슷한 종류가 몇 있지만 금괭이눈은 꽃잎은 물론 포엽까지 노란 황금색으로 짙게 물든다.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관찰해보면 난간 같은 포엽 위에 작은 사각의 됫박 같은 꽃들이 붙어있다. 자연은 직선을 만들지 않는 법인데 이곳은 유일한 예외인 듯 매끈하다. 함지박만 한 곳에 건설된 금색의 이 찬란한 문명(文明)을 홀린 듯 보노라면 많은 이야기가 울려나올 것만 같다.
아직 나는 산에서 살 수 없고 어둑어둑해지면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때 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그러니 이 맞춤한 시간에 만난 금괭이눈은 그 이름에서부터 부리부리한 느낌을 주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가이아의 눈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게끔 하는 것이었다. 금괭이눈,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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