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윤평중 칼럼] 꼴찌에게 보내는 獻詞

바람아님 2017. 5. 5. 08:21

(조선일보 2017.05.05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누가 대통령 당선되든 가시밭길 

환호는 짧고 難題는 쌓여 있어 풀 수 있는 길은 협치와 통합뿐 

대탕평으로 인재 모으고 최악의 안보 위기 극복해야 

유승민·심상정 등장은 큰 수확


윤평중 한신대 교수이번 대선의 백미는 TV 토론이다. 

생방송 자유 토론이 이미지 정치와 '묻지 마 투표'를 넘어 바람직한 민주정치인 숙의(熟議) 민주주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자들의 토론 능력은 현란한 말솜씨를 뜻하지 않는다. 

자유 토론은 각자의 그릇과 인품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후보자들의 국정 파악 능력, 공약의 튼실함, 비전과 경륜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모두 리더십의 핵심 자질들이다. 

민주정치에서 지도자의 토론 능력은 정치적 역량의 잣대 그 자체다. 

박근혜 전(前) 대통령의 처참한 실패가 통렬하게 증언하는 그대로다.


문재인 후보(이하 경칭 생략)는 선두 주자답게 노련하고 여유가 있었으나 느슨했다. 

안철수는 도전자다운 학습 능력과 진정성을 보여주었지만 서툴렀다. 

홍준표는 보수 우익에 걸맞게 단호하고 기민했으나 퇴행적이었다. 

총 여섯 차례의 5자 토론에서 시종일관 출중했던 후보자는 단연 유승민과 심상정이다. 

전문가 평가와 시민 평가가 완전히 일치한다. 

심상정은 합리적 진보의 대변자답게 노동을 중시하는 선명성으로 대중과의 공감대를 크게 넓혔다. 

유승민은 개혁 보수의 선구자로서 예리한 국정 파악 능력과 현실적 균형 감각을 증명했다. 

국정 이해도와 축적된 내공으로는 심상정·유승민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구도·바람·인물이 종합적으로 작용한다. 구도와 바람이 결정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유·심 후보의 뛰어난 자질은 현실 정치의 구도와 바람을 깨기엔 아직은 역부족이다. 

예컨대 문재인의 우세는 바람과 구도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번 대선은 촛불의 강력한 자장(磁場) 아래 진행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과 대척 관계였던 문재인이 줄곧 선두를 달리는 근본 배경이다. 

촛불의 바람이 태풍으로 커져 인물과 구도를 압도하는 형국이다. 

집권 여당이 증발해버린 다자 경쟁 구도도 제1당 후보 문재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결국 문 후보는 선거의 3요소 중 바람과 구도의 최대 수혜자다.


홍준표는 인물에서는 취약하지만 이념 대결 구도와 지역 구도에 힘입어 상승 기류를 타고 있다. 

안철수는 바람의 힘으로 문재인에 근접했음에도 인물과 구도의 약점 탓에 주춤하는 흐름이다. 

그러나 구도와 바람이 정치인의 경륜과 비전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리는 곳일수록 정치 발전은 요원하다. 

인물·구도·바람의 삼각형에서 인물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시민 의식이 진화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유승민의 개혁적 보수와 심상정의 합리적 진보에 힘이 실려야 기존 양대 정당의 적대적 공존 관계가 깨진다. 

그래야만 명실상부한 협치(協治)의 토대가 닦인다.


곧 19대 대통령이 탄생한다. 현직 대통령 파면이라는 비상사태를 뚫고 얻은 열매다.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대선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준다. 

스포츠처럼 선거도 끝날 때까진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할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짧은 환호 뒤에 거대한 어려움이 새 대통령과 정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명백하다. 

산적한 중대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차기 대통령 자리는 상처뿐인 영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난(國難) 극복의 길은 협치와 사회 통합뿐이다. 

새 대통령은 대 탕평책으로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야 한다. 

각 정당과 시민사회가 만나는 공치(共治)의 지평을 극대화해야 한다. 

6·25전쟁 이후 최악의 안보 위기를 국제정치적 현실주의로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장기적으론 햇볕정책과 압박 정책을 넘어서는 제3의 변증법적 통일 방안으로 한반도 평화 체제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내치(內治)에서 새 정부는 검찰과 청와대 같은 권력기관들을 총체적으로 일신해야 마땅하다. 

격차를 줄이고 일자리를 만드는 비상(非常) 시스템을 즉각 가동해야 한다. 

다른 정당과의 대연정(大聯政)과 시민사회의 협치 없인 첫발조차 뗄 수 없는 국정 과제들이다.


유승민이나 심상정이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차기 정부는 유·심 후보의 합리적 정책까지 적극 포용하는 광대(廣大)한 협치를 가동해야만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 

심상정의 대활약 덕분에 진보 정당의 몫이 늘어날 게 분명하다. 

바른정당의 붕괴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담대한 가치의 정치를 선택한 유승민은 일거에 '국민 정치인'으로 승격했다. 

지금 그들은 다섯 주자 가운데 꼴찌다. 

하지만 심상정과 유승민의 시간은 현재가 아니라 숙의 민주주의의 미래에 있다. 

비록 유승민과 심상정의 처음은 미약했을지언정 그 미래는 창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