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5.02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前 외교부 장관)
새 대통령의 외교적 성패… 트럼프와 관계 형성에 달려
사드 발언에 온 나라 발끈? 기를 쓰고 반응할 필요 없어
뒷감당 못할 화끈 외교보다 계산적이고 전술적 접근 해야
누가 대통령이 되든 다음 대통령이 맨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다.
그리고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정상회담에서 상면하기 전에 스스로의 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일 게다. 좀 과장하자면 새 정부 외교적 성패의 절반 정도는
어떻게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 간의 개인적 친밀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좌우될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단히 예외적인 대통령이다. 무엇보다 개인적 친분 관계에 크게 영향받는 사람이다.
그것을 일찍 간파했던 아베 총리, 시진핑 주석은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 결과 아베 총리는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분쟁 시 미국의 무조건 지원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은 환율 조작국, 불공정 무역국의 수반이 아니라 '대단히 케미스트리가 맞는'
'북한에 대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주 훌륭한' 정치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반면 '원칙'을 내세우고 공식대로 나간 호주 총리는 통화 중에 전화가 끊겼고,
메르켈 독일 총리는 19초간 아베 총리의 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 손과 악수를 못 나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만 일단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만나
'당신의 성공적 대통령직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
우리 함께 가자'라는 대전제하에 마음속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풀어놓는 게 상책이다.
지금 사드 비용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온통 나라가 시끄러운데 그렇게 즉각적으로 기를 쓰고 반응할 필요가 없다.
어느 대선 후보가 말했듯이 이다음 방위비 분담 협상을 염두에 두고 던져본 전술적 발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협상이라는 실전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미리 철저히 준비해 원하는 결과를 확보하면 된다.
4월7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AP 연합뉴스
한번 상상해보자. 미·중 관계, 미·일 관계가 잘 돌아가는데 한·미 관계만 삐걱댄다고 해보자.
아마도 그동안 우려하던 '한국 제쳐놓기(Korea-passing)'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 시진핑 주석과는 통화하면서도
직접 당사국인 한국의 지도자에게는 통화하지 않았다.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맹랑한 이야기가 미·중 정상 간에 오가는데, 그리고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점인데, 협상 국면이 시작되면 우리의 사활이 걸린 이슈들이 논의될 텐데
한·미 관계가 안 좋아 우리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 시원하고 화끈 담백한, 그러나 뒷감당 못하는 외교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는 의도를 숨기기도 하고, 우회하기도 하고, 타이밍을 기다릴 줄 아는
계산적이고 전술적인 외교다. 국민도 화끈하게 할 말 해대는 속 시원한 지도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우리가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레버리지는 얼마나 적은지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지도자를 기대해야 한다.
지난 22일 중국 환구시보는 '북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외과 수술식 타격에 중국은 군사 개입할 필요가 없지만
한·미가 38선을 넘으면 자동 개입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앞부분 발언은 북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뒷부분, 즉 38선 자동 개입 발언은 강대국 간의 철저한 권력 정치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정작 이 땅의 주인인 남북한 주민들의 원하는 바는 안중에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그러한 강대국 권력 정치에 대항하기 위해 필자는 우리 대북 정책의 초점이 비핵화와 동시에 남북 주민 간 접촉의 면을
넓히는 데 모여야 한다고 그동안 주장해왔다. 그래서 통일로 향하는 구심력, 통일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열망을 꾸준히
키워 왔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마저 제로 상태인 것이 한(恨)스럽다.
나는 새 정부가 그러한 대북 정책을 실시하기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한·미 관계의 안정적인 틀을 다져놓고 점진적으로 미국을 설득해가면서 대북 제재 범위 밖에 있는
예를 들어 보건 의료, 환경 협력 등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때 수영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레슨 강사의 말이 지금도 새롭다.
"몸에서 힘부터 빼세요. 수영 잘하고 싶거든"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외교도 마찬가지다.
당장 욕심 때문에 몸에 힘을 잔뜩 주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가라앉고 만다.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몸에서 힘을 빼고 파도를 타야 할 때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한다.
대미 외교와 관련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결기'가 아니라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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