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황금연휴를 맞아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 폭증해 무려 200만 명의 여행자가 인천공항을 빠져나갈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밀린 일감이 쌓여 미처 여행을 떠나지 못한 나는 ‘방 안에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며 집 정리를 시작했다. ‘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미니멀 라이프의 유행을 따라가기엔, 버릴 수 없는 책이 너무 많다. 물건은 처분할 수 있지만 책은 차마 버리기가 어려우니. ‘버릴 수 없다면 잘 찾아볼 수 있게 정리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평생 모아놓은 책이 마치 아름다운 관광명소처럼 손짓을 한다. 내게로 와, 내게 와서 머물라니까! 책들은 하나하나 이정표가 돼 ‘그때 그 시간, 내가 머무른 장소’로 마음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문태준 시인의 ‘여행자의 노래’는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짐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가방에 넣네.”
시인은 절망조차도, 잃어버린 형제조차도, 미열과 두통조차도 소중한 재산목록에 넣는다. 그 모든 보이지 않는 재산을 여행가방에 차곡차곡 넣어둔 채 ‘이 모든 것과의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異國)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여행자의 마음가짐 아닐까.
이현승 시인의 ‘여행자’는 방랑의 절정에서 느끼는 피로감을 고백한다.
“나는 이미 아문센만큼 걸은 것 같고/
이번엔 북극에서의 아문센보다 막막해 있다./
어쩌다가 나는 남극에 와서 헤매고 있는가?(…) 헤어지는 사람이 실은 더 연애를 갈구하듯/
죽으려는 사람이 가장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떠나온 사람들은 집 생각을 한다.”
정말 그렇다.
그토록 지루하던 일상이 여행을 떠나 돌이켜보면 다시 돌아가야 할, 소중한 베이스캠프가 된다. 헤어지자는 사람이 더욱 불타는 사랑을 갈구하듯, 죽으려는 사람이 가장 제대로 살고 싶은 사람이듯, 집을 떠나온 사람은 여행이 끝난 뒤 오히려 자신이 떠나온 집을 더 사랑하게 된다. 항상 붙어 있어서 미처 소중함을 몰랐던 ‘나’라는 집으로 돌아오는 먼 길에서, 우리는 비로소 최고의 여행을 만난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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