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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고 독후감 필수, 그래도 성황 … 지성인 새 놀이터 뜬다

바람아님 2017. 6. 11. 08:56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11 00:46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 독서 토론 가보니

지난달 23일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에 참석한 클럽 회원 15명이 『특이점이 온다』를 읽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지난달 23일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에 참석한 클럽 회원 15명이 『특이점이 온다』를 읽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지난달 23일 저녁 서울 압구정 성당 인근. 4층 건물 내 33㎡(약 10평) 남짓한 방에 15명가량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직업도 투자은행(IB) 직원·치과의사·교사·역술인 등 각양각색이었다. 가운데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참석자들은 이내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특이점이 온다』 읽고 열띤 토론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쓴 『특이점이 온다』(2007년)가 이날의 토론 주제였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특이점·singularity)이 올 것이고 유전학·나노·로봇기술의 발전으로 인간과 융합한 신인류가 탄생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AI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과 산업, 나아가 국가 간 경계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을 것인가 하는 건 전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뜨거운 이슈다. 그래서인지 초반부터 토론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동통신업체에 17년째 근무 중이라는 박범규씨가 먼저 산업현장에서의 트렌드를 소개했다. “일본 미즈호은행이 IBM의 AI인 왓슨을 현장에 배치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기술(STT)로 인해 전화상담원은 벌써 AI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자 역술인 이부민씨는 음양오행설의 원리를 들며 낙관론을 펼쳤다.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듯 직업이 없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 결국 밸런스가 맞춰질 것으로 본다.”
 
또 “향후 AI 시대에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가 출현한다면 인류는 그들을 과연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지 고민된다”(차현주씨·스쿠버다이빙 강사)거나 “지능지수(IQ)는 초집적 반도체의 힘으로 1만까지 성장한다면 감성지수(EQ)는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까. EQ가 인간만이 가진 특징 아닐까 싶다”(김병석씨·대학생)는 의견도 나왔다. 각기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서인지 토론은 시간이 갈수록 진지해졌다. 오후 7시40분에 시작된 모임은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독서클럽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의 독서 토론 광경이다.
 
스타트업 ‘트레바리’와 중앙SUNDAY가 협업
요즘 젊은 직장인과 대학생들 사이에 크고 작은 독서 토론 모임이 조용한 붐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논현동 북티크, 선릉역 근처에 자리 잡은 최인아책방 등 북카페를 겸한 독립 서점의 유료 독서 모임이 입소문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는 청년 창업가 윤수영(30)씨가 창업한 스타트업 ‘트레바리’와 중앙SUNDAY의 협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유형의 독서클럽이다. 트레바리란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책 읽기와 토론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스타트업을 세운 윤씨가 작명했다.
 
윤씨는 2014년 다음커뮤니케이션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바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PC세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모바일에 적응하지 못해 후배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는 상황을 보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회사를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재학 당시부터 6년여간 몸담았던 독서 동아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윤씨는 “새로운 관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대학원이나 같은 업계 사람끼리 스터디 모임을 하기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지적 활동공간은 많지 않다”며 “트레바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커뮤니티”라고 말했다.
 
2015년 9월에 4개 클럽, 회원 80명으로 시작한 트레바리는 현재 86개 클럽, 약 1300명까지 규모가 커졌다. 시즌(4개월) 단위로 클럽을 운영하는데 멤버십 회비(19만원 또는 29만원)를 내고 독후감을 써야 커뮤니티에 참여할 수 있다. 문학·영화·음악부터 정보기술(IT) 트렌드, 미디어정책, 야구 통계까지 다양한 주제의 클럽 가운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가입하면 된다. 물론 스스로 주제를 정해 클럽을 개설할 수도 있다.
 
돈을 내고 참여하는 독서클럽 트레바리의 성공 포인트는 역설적이게도 엄한 규율과 강제성에 있다. 윤씨 스스로 “돈을 내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참여 자체가 불가능한 변태 같은 서비스”라고 설명할 정도다. 회원 각자의 자발적 의사로 만났지만 운영은 철저히 룰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철칙이다. 우선 오프라인 모임 이틀 전 자정까지 정해진 책을 읽고 각 클럽 페이지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는데 최소한 400자 이상의 독후감을 올려야 하는 데다 1분이라도 독후감 제출이 늦을 경우 토론 모임에 참석할 수 없도록 엄하게 규율하고 있다. 회원 스스로의 자발적 참여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칙이다.
 
계급장 떼고 토론하는 개방적 분위기도 매력

와인 바 형식의 공간에선 토론이 끝난 후 회원들간 뒤풀이가 이어진다.

와인 바 형식의 공간에선 토론이 끝난 후 회원들간 뒤풀이가 이어진다.


클럽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분·나이 등에 얽매이지 않고 ‘~님’으로 호칭을 통일한다. ‘계급장 떼고’ 동등하게 참여하자는 취지로, 2030세대로부터 호응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 모임에서도 30대 전문직 여성, 50대 직장인 남성 등이 모두 서로를 ‘~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직장인 김명선(29)씨는 “한국 사회는 대체로 수직적인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 오면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상대방이 들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토론이 끝난 뒤에는 빌딩 지하 1층에 마련된 와인 바 형식의 공간에서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한다.
 
‘트레바리 for 중앙SUNDAY’는 지난달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 모집 36시간 만에 정원(25명)이 모두 찰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6월 토론 모임(26일)에선 황승식 서울대 의대 교수가 클럽장(토론을 진행하는 사람)으로 나서 독일 심리학자 게르트 기거렌처, 통계학자 발터 크래머, 경제학자 토마스 바우어가 쓴 『통계의 함정』을 놓고 토론할 계획이다. 올 9월 시작되는 새 시즌에는 중앙SUNDAY 독자들을 위한 클럽 회원 수를 늘릴 예정이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