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자였던 나이팅게일 부부는 딸들을 공부시키고 싶었으나 당시 대학들은 여성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직접 딸들을 가르치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둘째인 플로렌스는 기록과 정리를 좋아했다. 매일 여행한 거리와 출발·도착 시간을 기록하고 여행지의 법률과 토지 관리체계, 사회 상황을 꼼꼼히 적었다. 스무 살을 넘길 무렵 플로렌스는 수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결혼 적령기가 됐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둘째가 늘 걱정이었다.
사교댄스 대신 수학과 씨름하던 플로렌스는 23세 때부터 어머니의 속을 더 태웠다. 귀족 청년의 끈질긴 청혼을 마다한 채 간호사의 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간호 인력을 하녀나 길거리의 매춘부로 여기던 시절이다. 정작 플로렌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플로렌스가 집안의 반대를 뚫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 33세가 돼서야 독일의 병원에서 4개월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런던 개신교 병원의 무급 감독관으로 돌아왔을 때 설마했던 어머니는 격노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연간 1억원 가까운 돈을 몰래 대주며 딸을 돌봤다.
크림에서의 활동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영국 ‘타임스’지는 ‘모든 군의관이 퇴근한 밤에도 그는 천사처럼 작은 등불을 들고 부상병들을 돌본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를 접한 미국 신문기자 겸 시인인 헨리 워스워드 롱펠로는 1857년 발표한 ‘산타 필로메나(Santa Filomena)’라는 시에서 ‘등불을 든 여인을 나는 보았네(A lady with a lamp I see)’라고 읊었다. 플로렌스의 이미지가 ‘등불 든 여인’으로 굳어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정말 그랬을까. 플로렌스가 ‘백의의 천사’로 부각된 것은 시대적 상황의 소산이라는 주장이 있다. 바깥으로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 경쟁이 심해지고 안에서는 산업혁명 진행으로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마당에 ‘인간 정신의 승리’를 상징할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적격이었다는 주장이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과연 언론의 상징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일 뿐일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간호전문 교육기관을 만들고 인간 중심의 근대 간호학이 성립하는 데 플로렌스는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다만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라는 프레임에 갇혀 버린 플로렌스의 이미지는 실제와 다르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며 늦은 밤까지 부상병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도 필요할 땐 망치를 들고 창고 열쇠를 부순 개혁가라는 사실이 감춰져 있다. ‘망치를 든 나이팅게일’은 내려놓고 ‘등불을 든 나이팅게일’을 강조하는 데에는 여성 전문 인력에게 순종을 강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동명이인인 통계학 교수도 있다. 영국에서 1909년 태어나 1995년 사망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데이비드(Florence Nightingale David).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 계산기를 200만번 켰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통계학자다. 2차 대전에서는 독일군의 공습과 피해 정도를 예측하는 통계적 모델을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여성에게는 학과장 자리를 줄 수 없다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떠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대학 등에서 통계학과를 세우고 학과장을 지냈다.
통계학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데이비드는 89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크림전쟁부터 과로로 병치레가 잦았던 플로렌스는 노년을 데이비드 부부 집에 머물며 요양했다. 데이비드 부부는 늦둥이 딸에게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붙여줬고, 세계적인 여류 통계학자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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