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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남촌과 북촌

바람아님 2017. 6. 9. 09:01
한국경제 2017.06.08. 18:01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조선 중기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영의정까지 지냈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들이다. 이덕형은 남인, 이항복은 서인으로 당파가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의 우정을 평생 지켰다. 오성과 한음 설화도 조선 후기 당쟁이 심해지자 후대 사람들이 설화로 가공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이항복이 호는 백사이지만 오성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임진왜란 후 공로를 인정받아 오성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오성대감’으로 칭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울 남촌(南村)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문인·화가였던 표암 강세황, 다산 정약용 등도 남촌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서울시역사편찬원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을 북촌(北村), 아래로 남산에 이르는 일대를 통틀어 남촌(南村)으로 불렀다.


한양 도성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살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북촌에 많았다. 경화사족은 한양 및 그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을 특별히 지칭하는 것으로, 지방 사대부를 다소 낮춰보던 풍조를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 임금의 종친과 고급 관료, 권세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북촌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들이 남아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가회동, 안국동, 재동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반면 청계천 남쪽의 남촌에는 하급 관리들이나 가난한 선비, 군 장교들이 많이 거주했지만 일부 사대부들도 목멱산(남산) 청학동 계곡 주변 남촌에 거주했다. 지금의 회현동 일대로 회현동이 선비의 마을로 불린 배경이다.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앞의 ‘회현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12명의 정승이 배출된 것을 기리는 마을의 보호수로,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된다.

서울에는 북촌, 남촌 외에 중촌(中村)도 있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의관·역관 등 중인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중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이외에 한양 동쪽 동대문 근처의 동촌(東村), 경복궁 서쪽의 서촌(西村) 등도 있지만 북촌·남촌·중촌과 같은 지위의 지역명으로는 보기 어렵다.


서울시가 그제 회현동 일대 50만㎡를 북촌, 서촌과 같은 서울 도심의 역사적 명소인 ‘남촌’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발굴해 남촌만의 브랜드와 지역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구상이다. 회현(會賢)은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길게는 2000년, 짧게는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의 역사적·문화적 품격이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수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