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거기엔 원래 식당이 하나 있었다. 목련 한 그루가 있어 봄이면 맨 먼저 그 식당 앞은 화사한 옷을 입곤 했다. 그 식당 조금 지나면 등꽃이 가득 피어 매달린 쌀집이 있었고….
언젠가 딸네와 함께 그 식당엘 들어간 적이 있었다. 시아버지인 듯싶은 할아버지가 주문을 받고 며느리인 듯한 아주머니가 음식을 나르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 집 유리창에 ‘웰컴 투 우다다’라는 초록빛 글씨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우다다’라는 초록색 서각이 지붕 및 현관 위에도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그만 4층짜리 빠알간 벽돌집에는 (그동안 그 집이 빌딩 비슷한 것인 줄 몰랐다) 아이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왁자한 소리가 들려 왔다. 현관 앞 둥근 통에는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가득 꽂히기 시작했고…. 나는 식당이 하도 안 되니까 그만두고, ‘어린이 미술학원’ 같은 것이 들어왔나 보다 생각했다.
한데, 거기엔 ‘웰컴투 우다다’라는 글씨는 물론 ‘사랑합니다’라든가 ‘보고 싶었습니다’라는 글씨가 연둣빛 색연필로, 또 어느 날엔가는 그 집 현관 유리창에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구절이 흰 마분지 위에 흑자줏빛 글씨, 또는 파랑 글씨로 써 붙여지기 시작했다. 또 어느 날에는 ‘UDADA 우리는 다 다릅니다’라는 구절이 노랑, 파랑, 빨강의 알록달록한 글씨로 씌어 있었다. 언젠가는 유리창에 ‘무서워하지 마. 해치지 않아’ ‘너의 호미는 살아 있니?’와 같은 문구들이 흰 마분지에 분홍 글씨로 나붙기도 하고, 스승의 날에는 붉은 카네이션이 그려져 나붙기도 했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는 가슴을 때리는 구절을 만났다.
‘그대의 발이 되어 드리리…. 우다다 일동’.
발을 멈추고 그것들을 보다가 마침 휴지통을 비우러 거길 지나는 한 남학생을 발견하곤 “여기가 미술학원이니?” 하고 물었다. “아뇨” “그대의 발이 되어 드리리…, 좋은 말이구나.”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해치지 않아. 나는 그냥 글 쓰는 사람이야. 저 말이 하도 좋아서….” 나는 유리창에 붙은 한 문구를 흉내 내어 말했다.
남미에는 황제나비라는 나비가 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부터 멕시코의 한 나무(아마도 밀크나무라는 독특한 이름의 나무였지…)까지 긴 여행을 한다고 한다. 그 여행 동안 그 나비는 온갖 고초를 겪는다고 한다.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기 위해,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와 산란하기 위해 바닷속의 긴 여정을 겪는 것과 같이 황제나비도 자기가 태어난 멕시코의 나무로 돌아와 나뭇잎 가득 알을 낳고 죽는 것이다.
그러면 알에서 번데기를 통해 깨어난 나비들은 캐나다로 갔다가 다시 멕시코의 그 나무로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 돌아와 다시 알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들은 나비들이 알을 낳고 그 알들이 번데기가 되는 철이면 그 나무로 번데기를 모으러 나온다고 한다. 그 번데기가 무척 맛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멕시코의 나비는 정녕 황제다. 나비 중의 나비다. 나의 상상으로, 아마도 연어가 만나는 온갖 시련처럼 캐나다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동안 시련을 만날 것이다. 가뭄도 만나고, 태풍도 만나고, 들판의 꽃들도 만나고, 토네이도도 만날 것이다. 멕시코로 돌아올 때쯤이면 황제나비의 날개는 성한 데가 없을 것이다. 사방이 찢어진 날개로 밀크나무에 매달려 그 푸른 잎 위에 온 힘을 다해 가득 알을 낳을 것이다.
인간의 일생도 어찌 보면 그 황제나비의 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오히려 황제나비보다 못한지도 모른다. 평생, 좁은 고향이라는 공간에서만 일생을 보내고 만신창이가 되어 그 좁은 공간에서 바깥세상 구경 한 번 못 하고 이 지상을 떠나는 이도 많으니까.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몇 번 이사하면 일생이 끝나니까. 그런데 그 몇 번의 이사는 황제나비의 수천 킬로미터의 여정과 맞먹으리라. 아니 더하리라.
그러나 인간이 황제나비와 다른 점은 너무 명확하다. 언제나 ‘나는 살아 있는 호미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나비이며, 때로는 ‘그대의 발이 되어 드리리’ 하고 속삭이는 나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는 다 다르다’ 하고 중얼거릴 줄 아는, 프라이드가 있는 나비인 것이다. 우리의 날개에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어도 발이 되어줄 그 어느 날개인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들의 어떤 모임이 ‘평화의 나비’인 점은 어떤 ‘어른’도 가르쳐주지 않은, 프라이드의 이름이며, 나의 문학 모임의 한 달 한 번씩의 여행에 ‘나비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젊은이들도 프라이드의 문학을 놓지 않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황제나비의 여행을 우리 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다.
언젠가,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문에 끼여 세상을 떠난 청년이 남긴 것은 작은 공구 가방이었다. 그의 날개는 말하자면 작은 공구 가방이었던 셈이다. 또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떨어져 희생당한 젊은이의 날개는 김치 조각이 몇 개 든 도시락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작은 공구 가방, 그 작은 도시락 밑에는 수많은 발이 그것들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발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 그렇다. 어디선가,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작은 날개들로서 ‘우다다’의 하늘을 안고 팔락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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