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공론(公論) 조사'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공사 포기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공론 조사가 국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 7월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던 서울 외곽순환도로 사패산터널 공사 백지화와 관련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공론 조사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정부가 할 일을 시민에게 떠넘긴다"는 비판이 나왔고, 터널 공사를 반대하던 불교계는 "공사 강행을 위한 요식행위"라고 거부했다. 결국 노 대통령이 불교계를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한 끝에 공사가 재개됐다. 공론 조사가 사회적 갈등 해결자가 아니라 유발자로 주목을 받은 셈이다.
원래 공론 조사는 공적 의견을 깊이 있게 파악할 목적으로 약 30년 전 미국에서 고안됐다. 우선 대표성 있는 표본을 대상으로 찬반 여론조사를 한 뒤 표본 중에서 선정한 시민 배심원을 한자리에 모아 찬반 양측 정보를 학습시키고 토론한다. 마지막으로 시민 배심원을 대상으로 다시 여론조사를 해 의견의 변화, 즉 숙의(熟議) 과정을 거친 공론을 확인한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가 질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답했는지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공론 조사 결과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정책적 이슈의 의사 결정에 반영할 만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래도 공론 조사는 결국 여론조사의 한 종류일 따름이란 의견도 있다. 표본 추출과 설문 과정에서 여론조사의 오류 가능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차 조사, 합동 토론, 2차 조사 등 공론 조사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화 여론조사에 잠깐 응답하는 것에 비해 훨씬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대표성 있는 배심원 선정이 쉽지 않다. 토론 과정에서 목소리 크고 말 잘하는 소수에 다수가 설득당할 경우에는 결과가 왜곡될 수도 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전 안전성에 대한 국민의 긍정 평가는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출한 2009년 61%에서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인 2012년에 35%로 급락했고 작년에 53%로 다시 상승했다.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원전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것이다. 공론도 여론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점에서 표출된 의견이다. 따라서 "공론 조사 결과를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위험한 대중 영합주의다.
공론 조사를 창안한 스탠퍼드대학 제임스 피시킨 교수는 '민주주의와 공론 조사'란 책에서 공론 조사에 대해 "생명력 있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면서도 "모든 정치적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시민 배심원 501명에 의해 결정된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예로 들며 "일반 시민의 결정권에 제한이 없다면 비록 숙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부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공론 조사가 국가 대계를 정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지닐 전망이다. 공론의 확인은 필요하지만 공론 만능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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