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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29)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

바람아님 2017. 10. 11. 16:03

(경향신문 2011.07.10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ㆍ위험한 사랑

 

“사내란 제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는 힘이 나지 않는 법이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홀린 듯 읽었습니다. 

<칼에 지다>는 달빛 아래 오솔길을 뚜벅뚜벅 걸을 줄 아는, 사무라이 세상의 끄트머리를 살았던 한 하급무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노를 삭일 줄 알고, 단장(斷腸)의 심정을 알고, 나라와 맞바꾸어도 절대 죽게 해서는 안되는 목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죽을 자리를 찾아갈 줄 아는 사내의 이야기가 찡했습니다. 사내가 없습니다, 이 시대엔. 왜 사내가 없는 거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내는 루벤스의 저 그림(‘삼손과 델릴라’, 1609~1610년경, 목판에 유채, 185×205㎝, 내셔널 갤러리, 런던) 

속의 사내, 삼손입니다. 사내다운 사내였지요, 삼손은. 그는 싸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사자를 찢어 죽인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각할 줄 알고 또, 툭 털어낼 줄 알았습니다.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의 상황은 사랑의 함정에 빠져버린 삼손입니다. 저 근육질의 잘생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든 

요염한 여인은 팜므파탈의 계보에 있는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이방여자 델릴라를 사랑했고 델릴라 때문에 힘이 빠졌습니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9)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삼손과 델릴라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은 삼손은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를 만나 

자기 힘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때는 그저 힘을 잃은 삼손이 안타까워서 왜 그랬느냐고, 왜 이방처녀와 

사랑에 빠져 여호와를 진노케 했느냐고 삼손에게 죄를 묻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삼손이 좋습니다. 그는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방인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위험한 사랑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백한 

영웅이었습니다. 

그 삼손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머리카락이지요? 

삼손은 나면서부터 신께 바쳐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잘라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은 그의 약점이기도 

한 거였습니다. 사실 영웅들의 힘의 원천은 모두 그의 약점이기도 하지요? 


아킬레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모세도 모두 약점이 있었습니다. 영웅은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인배가 파멸이 두려워 약점 뒤에 숨는 사람이라면 영웅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자연히 파멸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남의 약점만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불행히도 삼손의 델릴라가 그랬습니다. 

델릴라가 삼손을 망가뜨릴 여자인 건 삼손과 살면서 삼손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된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림 속에서 사건은 델릴라의 침실에서 벌어지고 있네요. 삼손이 델릴라의 무릎 위에서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손과 델릴라의 이야기를 잊고 아무런 편견 없이 그림 속의 남녀만을 본다면 주제는 애욕, 아닐까요? 

온전히 사랑한 후 껍데기만 남은 남자와, 그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당당해진 여자! 

어쩌면 루벤스는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은밀한 애욕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애욕을 평가하는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델릴라의 침실 안에 침입자가 있지요? 

한 남자는 손에 가위를 들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고, 노파는 그 남자를 위해 빛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쩐지 노파의 미소가 불길하기만 한데, 문 밖에서는 삼손을 잡아가려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팔아먹는 델릴라의 아름다운 육체를 보고 있노라면 슬퍼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저 소중한 것을 저렇게 싸구려로 팔아넘길까요? 자신을 팔아먹고자 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남자는 어리석은 남자겠으나, 어리석어보지 않으면 또 어찌 지혜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오는 법이니까요. 

나는 사랑의 덫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한 삼손의 자유로운 기질이 좋습니다. 


마음이 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은 마음이 한바탕 놀아야 할 곳입니다. 

마음 가는 곳이 위험하다고 가지 않으면 생은 안전하나 지지부진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곳, 그리하여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곳, 그곳이 마음 가는 곳입니다.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
(1609~1610년경, 목판에 유채, 185×205㎝, 내셔널 갤러리, 런던)




칼에 지다 (상·하) : 아사다 지로 장편소설. 上 & 下
<아사다 지로> 저/<양윤옥> 역/ 북하우스/

2004년12월 / 462 & 455 pp
833.6-ㅇ151ㅋ-1=2/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 어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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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경향신문(2011.1.02 ~ 2011.12.21)


< 명화를 철학적 시선으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


(1) 반 에이크 ‘수태고지(경향신문 2011.01.02) 

(2) 클림트의 ‘다나에(2011.01.09)

(3)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2011.01.16)

(4) 샤갈의 ‘거울’(1915)(011.01.23)

(5)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푸시케'(2011.01.30)


(6) 루벤스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2011.02.06 20)

(7)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2011.02.13)

(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2011.02.20)

(9) 루벤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2011.02.27)

(10)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2011.03.06)


(11) 폴 고갱 ‘신의 아이'(2011. 03. 13)

(12) 고흐 ‘슬픔'(2011. 03. 20)

(13)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2011. 03. 27)

(14) 밀레의 만종(2011. 04. 03)

(15)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2011. 04. 10)


(16)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짐(2011. 04. 17)

(17)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2011. 04. 24)

(18)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2011. 05. 01)

(19)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2011. 05. 08)

(20)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2011. 05. 15)


(21)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2011. 05. 22)

(22) 티치아노의 ‘유디트’(2011. 05. 29 )

(23)이 시대의 오르페우스, 임재범(2011. 06. 05)

(24) 모로의 ‘환영’(2011. 06. 12)

(25)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2011. 06. 19)



(26)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는 카미유’(2011. 06. 26)

(28) 조르주 로슈그로스의 ‘꽃밭의 기사’(2011. 07. 03)

(29)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2011. 07. 10)


(30) 고흐의 ‘해바라기’(2011. 07. 17 18: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71810135&code=990000&s_code=ao080


(31) 모네의 수련 연못(2011. 07. 24 22: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242220555&code=990000&s_code=ao080


(32) 르누아르의 ‘빨래하는 여인들’(2011. 07. 31 19:5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311955575&code=990000&s_code=ao080


(34)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2011. 08. 10 21:4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02144015&code=990000&s_code=ao080


(35) 오처드슨의 ‘아기도련님’(2011. 08. 17 19: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71924545&code=990000&s_code=ao080


(36) 렘브란트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2011. 08. 24 19: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241936355&code=990000&s_code=ao080


(36) 마티스의 ‘원무’(2011. 09. 07 21: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072117585&code=990000&s_code=ao080


(38) 앙리루소 ‘뱀을 부리는 여자’(2011. 09. 14 21: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142117305&code=990000&s_code=ao080


(39)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2011. 09. 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12109455&code=990000&s_code=ao080


(40)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2011. 09. 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81932525&code=990000&s_code=ao080


(41) 폴 세잔 ‘수욕도’(2011. 10. 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051853345


(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2011. 10. 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122100265


(43)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2011. 10. 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191946195


(44)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2011. 10. 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262142355


(45) 밀레의 ‘접붙이는 사람’(2011. 11. 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021842215


(46) 뭉크의 ‘절규’(2011. 11. 09 2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092103325


(47)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2011. 11. 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162051265


(48) 샤갈의 ‘떨기나무 앞의 모세’(2011. 11. 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302103105


(49) 고갱의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2011. 12. 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2072102435


(50)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2011.12.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21205713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