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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칼에 지다 - 아사다 지로

바람아님 2017. 10. 11. 16:57

(조인스 블로그 201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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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年 6月 30日 1판 6쇄본 / 북하우스 / 아사다 지로 

 
  아,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요.
  저도 모르게 맑고 따뜻한 눈물을 주르륵 흘리게 하는 이 책을.
 
  오늘처럼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 가슴속까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
  그렇고 그런 일상에 지쳐 애꿎은 하늘만 눈 시리게 올려다볼 때,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 걱정에 벌써부터 옷깃을 꼭꼭 여미고 있을 때,
  든든하게 곁을 지키는 가족이 있어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텅 비게 느껴질 때,
  이 세상 어딘가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을 참된 사람의 향기를 맡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이 책 <칼에 지다>를 펼쳐 보십시오.
  스산한 바람도 눈 시린 하늘도 꼭꼭 여민 옷깃도 텅 빈 마음도, 투명한 감동 속으로 사르르 녹아들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의 의(義)와 인(仁)과 성(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 방 책꽂이에는 이 책이 여러 권 꽂혀 있습니다. 마음이 따스한 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지요.
  더불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께 헌정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도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부디 긍지를 잃지 마시길! 당신들이 있어 삶이 더 빛이 납니다.
 
  난부의 말단 무사였던 요시무라 간이치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탈번을 감행한 그는, 말기 막부의 신센구미의 일원이 되어 시대와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진정한 친구의 곁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뿐이 없었던 비운의 인물입니다.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신념(가족을 지키려는)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은 요시무라는,

존경과 경의 그 자체입니다. 어처구니없는 패륜 사건이 연일 터지고 있는데도 점점 무감해져만 가는 이런 시대에선,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수 없는 사람이지요.
  죽음을 목전에 둔 그의 독백과,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신센구미 동기생, 제자, 친구의 아들, 친구의 하인 등등-의

회상이, 번갈아 스토리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요시무라의 독백 속에는 그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배를 가르기 전 딸 미쓰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는, 내내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참말로 가슴 시린 눈물이었습니다.
 
  일본 문학이라면 고개부터 젓던 제게 편견의 백해무익함을 일깨워 준 아사다 지로에게 부러움과 감사를 보내며,
  제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준 역자(양윤옥-번역도 참 훌륭했습니다) 후기와 본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 올립니다.
  메마른 겨울의 문턱에서 사람이 삶이 세상이 주는, 이 눈물겨운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이여, 칼을 함부로 휘둘지 마라!
    저기, 요시무라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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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재미있어 일단 펼쳤다 하면 책을 놓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고급스런 품격과 문장의 격조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독자에게, 작가 본인에게, 그리고 한 귀퉁이 번역자에게도 큰 축복이다. ……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마음속 가야금을 가장 낮은 현에서부터 가장 높은 현까지 남김없이 퉁겨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까지 쏟아내게 한 다음,

그 눈물이 어느새 삶의 고단함을 구석구석 적셨는지, 문득 깨닫고 보면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보자는 맑은 힘이 솟아나게

하는 신비한 재능, 아사다 지로에게 또 한 방 크게 얻어맞고 말았다. …… 어느 때보다 감동이 그리운 시절이다.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것은 충격이나 파격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의 신산고초를 두루 겪고 성실히 필력을 갈고

닦아 품새는 넓고 다정다감하며 탄탄한 구성과 품격 높은 문체를 펼치는 작가가 짐짓 천연덕스럽게 퉁겨 주는, 심금을 울리는

연주 솜씨! 충격이니 파격의 사태에 밀려 소설이 가져야 할 인정과 감동의 미덕이 우리 문단에서 그 위치가 미미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역자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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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이 따뜻한 이불 속에서 어머님께 안겨 있어도 좋겠지요. 모라오카의 꿈을 꾸어도 좋겠지요.
  어서 어서 봄이오면 좋겠습니다. 아즈마네 산의 눈이 녹으면 거리에는 새하얀 목련꽃이 피겠지요.


  봄보다 더 일찍 피어나는 목련꽃이 나는 좋습니다. 그 꽃은 북풍을 향해 피지요. 다른 꽃들은 모두 햇빛이 따뜻해진 다음에야

하늘을 우러러 피어나지만, 새하얀 목련꽃만은 잔설이 남은 봄의 건널목에 북쪽을 향해 핍니다. 모리오카는 그 꽃이 피자마자

무어라 말할 길 없는 달콤한 향기로 가득합니다. 농부들은 그것으로 봄이 찾아온 것을 알고 밭일에 나섭니다.


  나는 해마다 그 계절이 되면 동쪽 이와테 산에 꽃구경을 하러 나가 번교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난부 모리오카는 에도에서 백사십 리나 되는 오슈 가도 끄트머리인 탓에 서쪽 지방처럼 수확은 많지 않다. 너희가 풍족한

서쪽 지방 아이들을 앞질러 입신 출세하고 고향 땅을 번듯하게 지키기란, 참으로 예삿일이 아니니라. 모리오카의 벗꽃은

바윗돌을 가르고 피어난다. 모리오카의 목련꽃은 북쪽을 향해 피어난다. 그렇다면 너희 또한 가만히 앉아 봄이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난부의 무사라면 훌륭하게 돌을 깨고 피어나라. 모리오카의 자식이라면 북풍을 향해 피어나라.

봄보다 앞장서서, 이 세상을 앞서서 훌륭한 꽃으로 피어나거라.


  어머님. 나는 고향에서 수고료도 못 받던 조교였으나, 제자들에게는 誠心을 가르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가르치려

애썼습니다.


  사서오경을 제아무리 배워도, 그딴 것, 개똥만큼도 쓸 데가 없습니다. 번듯한 선생들은 모두 그 가르침을 忠이라는 한 글자로

바꾸어 가르치지만, 공자님의 가르침은 그런 게 아닙니다. 仁도 義도 禮智信도, 그건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주려는 덕목이 아닙니까.


  나는 아카자와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 추천을 받아 번교 바깥 복도에서 강의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항상 교실 안에 앉아 있는 높은 집안 자제의 등을 바라보며 공부를 했습니다. 내 앞에는 책상도 없었고 독본조차 없었습니다.


  내 처지가 그러했으니 오히려 공자님 가르침의 진수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전해준 사서오경의 진수를 제자들이 똑똑히 깨우쳐서, 어느 날인가 忠이라는 한 글자 대신 誠 한 글자의 깃발을

푸른 하늘 높직이 펄럭여 주기만을 바랐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건 천왕의 깃발도 천왕 가의 문장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우리 비천한 출신들이 도바 후시미의 눈 쏟아지는 하늘 높이 올렸던 誠 한 글자의 깃발 아닐까요.


  운신조차 힘든 시대의 업을 등에 지고도, 신센구미 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그 깃발을 높직하게 받들어 올린 것입니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많건 적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센료마쓰 결전에서 다들 상처 입고

쓰러졌을 때, 새로운 시대의 물결에 떠밀려 무너지려 할 때도, 나는 만만하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전장에서 죽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으나, 물러서려 해도 내 발은 뿌리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탈번자이지요. 살기 위해 주가를 버리고 처자를 등지고 결국에는 늑대가 되어 천왕의 깃발에조차 칼을 들이댄

발칙한 인간이지요. 그러하나 나의 길이 불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소이다. 불의도 불륜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맞섰던 것은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불의로 만들고야마는 더 큰 불의였습니다."
 
 "신센구미 동료들은 나를 두고 돈벌이 나온 낭사라고 숙덕였다. 수전노라 했다.

래도 나는 내 행동이 무사도에 어긋나는 짓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 무사의 의무란 민초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민초는 내 아내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님은 인을 말하고 의를 말하셨지만, 인간의 도리는 가장 먼저 처자식에 대한 인과 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더냐."

 
 "세상살이의 모진 어려움을 꾹 참고 견뎌낸 끝에, 마침내 검을 움켜쥔 그 순간 과감하게 싸울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난부 무사의 영예이니라.


  결코 빈천과 부귀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자, 그중에서도 무사다운 자,

사내대장부다운 자의 가치는 한마디로 내면의 용기에 달린 것이니라."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다들 타인을 도끼눈으로 올려다보거나 혹은 내려다보고 때로는 옆눈으로 흘겨볼 뿐

결코 정면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사람은 항상 누구에게나 그 맑은 눈을 똑바로 향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좋았습니다. 얼른 눈에 띄는 풍채도 아니고 돈도 없고 말도 잘 못해서 윗사람들에게는 은근히

바보 취급을 당했지만 우리 젊은 대원들은요, 모두 그 사람을 좋아했어요.


  글쎄, 겉모양이라든가 돈이 있고 없고 하는 것, 말 잘 하는 것, 그런 건 다 인간의 허세 아닙니까?

실세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요시무라 선생님, 어느 누구보다 강했어요. 게다가 어느 누구보다 착했어요.

강하면서도 착한 것, 그게 바로 사내대장부의 가치 아닙니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어요?


  그 사람은요,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항상 똑바른 정안 자세로 대응했습니다.

그 자세만이 올바른 자세라고 믿으면서요.


  삐뚤어졌던 건 이 세상 쪽이었지요. 물론 나도 포함해서요."
 
 "그나저나, 손님.


  신시대도 좋고 데모쿠라시란 것도 다 좋지만,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그런지 요즘에는 도무지 사내다운 사내를

찾아볼 수가 없어. 그리 생각하지 않소?


  내 사업장에 발을 들인 젊은 애들만 봐도 꾸지람 몇 마디 들었다고 휑하니 나가버려. 남의 돈 먹기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어디 한번 끝까지, 꾹 참아보자, 이런 정신이 당최 없어.


  하긴 전쟁 특수 덕분에 여기저기 흥청망청, 먹고살기가 편해졌지. 굳이 힘든 일 안 해도 세 끼 밥은 그럭저럭 입에

들어가거든. 그러니 사내다운 사내를 만들자는 것 자체가 아예 억지소리가 되고 말더라니까.


  통 고생을 해보질 않아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여. 여자가 그러면 나쁠 것도 없지만

사내놈이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건 말요, 절대로 좋은 게 아냐. 그만큼 어리석은 놈이라는 얘기지.


  군대라는 데는 그야 죽는 방법은 일러줘. 그렇지만 사는 방법은 가르쳐 주질 못해. 사실은 그쪽이 훨씬 더 중요한데 말야.

아니,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내놈이 죽는 방법을 어찌 알겠느냐고.


  세상이 좋아지는 바람에 제대로 사는 방법을 모르는 그런 얼간이 같은 사내놈들이 많아졌다, 이거지.


  나야 이리 길게 살아서 온갖 망령을 다 떨고 있소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노 지로우에몬 나리나 요시무라 간이치로

선생은 제대로 사는 방법을 깨쳤던 훌륭한 사내들이셨소. 옳은 방법으로 살았기 때문에 옳게 죽을 줄도 알았어.


  뭣, 그리 생각할 수가 없으셔?


  지로에 나리나 요시무라 선생이 옳게 살고 옳게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드신다, 그 말씀이시고만. 거참, 그것이 좋게 안 보여?

그게 좋게 안 보인다는 건 말요, 이보쇼, 손님도 역시 고생이 뭔지 모르는 신시대 사람이란 얘기야.


  나는 참말로 좋게 보이기만 하네. 무사도니 뭐니, 그런 건 다 개똥 같은 거야. 그저 사내가 사내로서의 지조를 초지일관

살아내면 그렇게 훌륭하게 죽을 수 있다고 나는 지금도 철석같이 믿고 있소.


  사내라면 사내답게 살아야지. 지조 있게 죽자는 게 아뇨, 지조 있게 살자는 거야. 지조 있게 산다는 건 제 몫을 다한다는 거요. 내가 꼭 해야 할 일,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칼같이 해내면서 살아야지.


  그러면 누구라도 훌륭한 사내가 될 수 있어. 지로에 나리도 요시무라 선생도 각자의 몫을 칼같이 해낸 분들이야.

내 눈으로 보면 그 두 분이 똑같이 사내대장부 중의 사내대장부요.


  그거,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 처자식이나 수하의 고생을 사내라면 제 등판으로 짊어지면 되는 거야. 나는 평생 처자식도

못 거느린 투전꾼 떠돌이지만, 그 대신 천 명 남짓한 수하들의 고생은 내가 다 짊어지겠다는 각오로 살았소.


  손님도 앞으로 기나긴 인생, 공명이나 떨쳐보려는 쩨쩨한 마음은 버리쇼.
  그저 오로지 사내답게 살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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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야...


  마침내 배를 가르기로 결심하고 좌정한 순간, 네 모습이 어른어른 떠오르고 말았다.


  네 어미도 가이치로도, 아직 보지 못한 젖먹이까지도, 아버지,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음껏 장렬하게 배를 가르세요, 라고 격려해 주건만 너만은 허락을 해주지 않는구나.


  아버지, 죽지 마세요, 하고 너 하나만은 섧게 우는구나.


  아비에게 딸이란 참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애물이다. 때려줄 수도 없어. 큰 소리로 나무랄 수도 없고.

그저 어물어물 어르고 달래며 제풀에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그새 여덟 살이 되었겠구나. 참말로 예쁜 꼬마 아가씨로 자랐을 테지. 어려서 헤어진 뒤 육 년 긴 세월 동안 안아주지도

못하고 입도 못 맞춰주고, 참말로 미안했다.


  네 자랑을 시작하면 신센구미 동료들은 모두 "또 미쓰 얘기" 라며 웃었지.

두 살배기 때 헤어지고 한 번도 못 본 딸 얘기를 잘도 지어낸다고 말야.


  미쓰야. 아비는 말이지, 네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식을 멀리 팽개쳐 놓고 이런 얘기를 해봐야 너는 믿지도 않을 것이다만.


  그러나 아비는 너를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상한 소리지만, 너와는 지난 육 년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던 것만 같다. 그럴 만큼 아비는 항상 너만 생각했다.


  아비에게 딸이란 그런 거야.


  얘, 미쓰야. 아비의 얼굴도 생김새도 하마 다 잊었을까. 


  작은 몸 어딘가에 따스한 아비의 체온이나마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 좋아하는 남정네의 품에 안길 때까지

아비의 체온이나마 기억해 주면 좋으련만. 시집을 잘 가서 서서히 아비의 온기를 잊어준다면 그건 참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아아, 가이치로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공자님 말씀에,  부귀는 모두가 원하는 것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곳에 머물지 않느니라. 빈천은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나, 그것이 비록 정당하게 얻게 된 것이 아닐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느니라."


  아비가 탈번을 결심한 것을 영민한 네 오라비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말을 차마 아비 면전에서 물을 수 없어서

밤이면 밤마다 그 한 구절을 거푸 읽어가며 아비를 훈계하려 했던 게지.


  그러나 말이다, 미쓰야.


  아비는 인간의 길을 걷고자 하였을 뿐 부귀를 탐하였던 것은 아니다. 빈과 천을 부당하게 벗어나려 했던 것도 아니다.

호의호식까지는 못 시켜주더라도 너희가 비참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해줄 수만 있었다면 아비가 그토록 어긋난 짓을 할 까닭이

없었다. 평생을 이타 이인부치의 말단 무사여도 좋았다.


  야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그해 겨울만은 아무래도 무사히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누가 어떤 욕을 하건 돈푼이나마 있으면 그래도 사람은 목숨은 부지하는 법이다. 무사 신분을 버리고 시즈쿠이시 고향에

신세 지는 처지더라도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야. 너희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이 아비의 마음먹기

하나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어미는 안방에서 짚 이불을 둘러쓰고 아비는 토방에 앉아 고개 숙인 채 서로 숨죽여 눈물만 떨구는 이별을 하였다.


  아비는 그때 똑똑하게 알았다.


  나의 주군은 난부 나리님이 아니었어. 조장님도 아니었어. 너희야말로 나의 주군이었다. 아비는 그때 그것을 똑똑하게

깨달았다. 왜냐, 나는 너희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든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니. 어떤 각오도 필요 없이, 무사도니 대의

따위 필요 없이, 너희가 죽으라고 한다면 아비는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니.

그러니 너희야말로 틀림없는 나의 주군이라고 생각했다...


  미쓰야. 아비는 배를 갈라 죽더라도 언제나 네 곁에 있으마. 


  시집을 갈 때는 등불을 받쳐들고 네 발치를 비춰주마.


  그뿐인 줄 알았더냐. 아비는 네게 이 나라에서 제일 좋은 신랑감을 꼭 붙여줄 게야.


  돈이 있고 없고는 아무려나 상관없어. 실력 있고 정직하고 착하고, 무엇보다 너를 목숨처럼 사랑해 줄 훌륭한 신랑감을

이 아비가 꼭 붙여주고말고.


  신랑이 이와테 산이라면 너는 히메가미 산.


  사계절 철철이 우리 눈을 쏙 빼가는 저 히메가미 산처럼 어여쁘고 지조 있는 여자가 되어다오.


  그리고 의젓한 남편에게 안긴 그날 밤부터는, 천왕을 거역했다가 배를 가르고 죽은 이 아비 따위는 깨끗이 잊어다오.


  아비는 이제 피를 쏟고 숨이 까막 넘어갈 때까지 너의 이름을 천 번을 부르마.

너를 버린 나를 "아빠" 하고 불러 준 너의 이름을 만 번이라도 부르마." 

- 본문 中. 

 


칼에 지다 (상·하) : 아사다 지로 장편소설. 上 & 下
<아사다 지로> 저/<양윤옥> 역/ 북하우스/

2004년12월 / 462 & 455 pp
833.6-ㅇ151ㅋ-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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