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트럼프 연설의 여운

바람아님 2017. 11. 11. 07:39

(조선일보 2017.11.11 김태익 논설위원)

'케네디 연설' 하면 흔히 그의 취임 연설을 떠올리지만 또 하나 잊지 못할 연설이 있다.

1963년 독일 서베를린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소련 흐루쇼프가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쌓으며

서베를린을 침공하겠다고 협박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서베를린으로 날아가 시청 발코니에 섰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서베를린 시민과의 연대(連帶)와 자유세계 수호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시민들은 열광했다. 


▶영어 speech의 한자 번역어는 원래 演舌(연설)이었다고 한다.

이를 演說(연설)로 바꾼 것은 일본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演舌은 혀를 놀리는 것이다. 演說은 말을 펼친다는 뜻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정치는 곧 연설이었다. 임기응변의 화려한 언변을 연상케 하는 설(舌)보다는

소통과 설득을 목표로 하는 설(說)이 스피치 뜻에 가까워 보인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몇 마디로 간결하게 정리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언론·신앙의 자유와 결핍·공포로부터의 자유 등 '네 가지 자유'를 얘기한 루스벨트 연설….

미국 대통령은 대개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연설을 하나씩은 갖고 있다. 


[만물상] 트럼프 연설의 여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 국회에서 한 연설의 여운이 이어지고 있다.

정제된 표현과 쉽고 명확한 문장으로 연설문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당초 그의 연설에 대한 우려가 많았기에 반향 또한 큰 것인지 모른다. '화염과 분노' '오직 한 가지 방법만 있을 뿐' 같은

과거 트럼프의 강하고 공격적인 발언은 우리 국민에게도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가 한국 현대사와 남북한의 질적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게 눈길을 끌었다. 트럼프는 전쟁 참화를

딛고 '지구상 가장 부강한 국가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에 대해 '기적적인(miraculous)'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썼다.

그러면서 "한국은 자유와 경이, 문명과 놀라운 성취가 있는 미래를 선택했지만

북한은 지도자가 압제, 파시즘, 억압의 가치 아래 국민을 감옥에 넣고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기적'은 언제부턴가 입에 올리기 힘든 말이 됐다.

'뉴라이트 사관'이라고 낙인찍힐까 봐 조심하는 풍조마저 생겼다.

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을 문제투성이의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던 것처럼 거꾸로 가르치고 있다.

잘못된 현대사 인식이 국민의 자존감을 뿌리부터 갉아먹고 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우리 교과서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한다.

기막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