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2.19 유석재 기자)
현길언 前 한양대 교수, 계간지 '본질과 현상' 50호 발행
13년간 기획·편집·발행 도맡아
4·3 사건 반론 실어 위기 겪기도
"힘 있는 언어보다는 나약한 언어로, 설득의 언어보다는 고백의 언어로,
가치의 언어보다는 성찰의 언어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주말 계간지(季刊誌) '본질과 현상' 50호를 낸 현길언(77) 전 한양대 교수는 지난 13년간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아
사실상 혼자서 이 잡지를 만들어온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18일 만난 현 교수는 "욕심내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막 인쇄돼 나온 50호를 집어들곤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2004년 미지의 개척지처럼 보이던 인터넷 세상으로 모두 뛰어들 때, 제주도 출신 소설가인 그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듯 보였다. 유명 출판사들도 하나둘씩 손을 놓던 계간지를 새로 창간하겠다니!
"문화 권력으로 행세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죠.
자기의 가치나 이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눈다는 취지였습니다."
현상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 문제에 다가가겠다는 그의 잡지는 학술지이자 문예지이고,
시사지이면서 비평지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목소리와 갈등이 분출하는 광화문광장 앞에 선 현길언 교수는 “역사는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믿으며 고백과 성찰의 언어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경기 군포의 한 건물 좁은 옥탑방에서 현 교수는 '본질과 현상'의 첫 호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직원을 두지 않고 전문가 그룹과 제자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기획, 편집, 원고 청탁, 교정까지 도맡았다.
1000부를 내기 위해 1년에 4000만원 정도 드는 출간 비용을 광고와 후원으로 충당했지만 해마다 후원금이 줄어들었다.
"다들 '저 사람이 한 2~3년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다더군요."
'역사는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소박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잡지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는 "왜곡되기 쉬운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항상 소수자의 의견, 주변적 진실을 전하려 애썼다"고 했다.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건 소수의 진실이었습니다. 종교개혁도 프랑스혁명도 다 그랬지요."
신(神)과 인간, 학문과 교육, 주체적 삶과 세계관 같은 굵직한 주제를 다루던 잡지는 노무현 정부의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한 반론을 2013년 실으면서 위기를 겪는다.
"4·3 사건의 본질은 남로당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는 처음부터 '4·3은 정당한 민중 봉기인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무력으로 탄압한 것'이란
프레임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진상 규명보다는 명예 회복에 무게를 뒀기 때문에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반(反)인권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낳게 됐다는 것이다.
다들 진영(陣營) 간의 '이분법적 담론'에 압도돼 있을 때, 방대한 보고서와 문서를 꼼꼼히 숙독하고 연구한 끝에
'아니다'라고 외친 그의 목소리는 지식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4·3을 직접 겪었던 현 교수가 혈서(血書)처럼 쓴 글이었지만 항의와 강연 취소, 잡지 광고주에 대한 협박이 뒤따랐다.
지난여름에는 한 호 전체에 걸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후원금이 일부 끊기는
일을 겪기도 했다. 잡지는 50호부터 그가 '우리 사회의 악령'으로 지목한 편의주의(便宜主義)의 폐해를 짚는다.
"다들 지나치게 편리한 것을 추구하다가 창조, 가치, 미(美) 같은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육의 편의를 위해 EBS 교재에서 수능 문제를 내려다 교실이 황폐화된 것이 그 예죠."
앞으로 몇 호까지 낼 예정일까.
"처음부터 그런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저 한 권씩 만들어 갈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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